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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noel Jan 30. 2020

두 세계의 만남

앨리 스미스의 '가을'을 읽고

저마다 나이만큼의 세계를 마음속에 품고 산다. 그리고 생을 마감할 때 세계는 사라진다. 자아, 정서, 취향 등 쌓아왔던 기록들이 흔적 없이 날아가 버린다. 왠지 아깝다는 마음이 우선 일어났다면, '가을'에 나오는 대니얼의 경우에 관심이 갈 것이다. 영감을 자극하는 놀라운 이야깃주머니, 대니얼의 특별한 영혼은 젊은 시절 독특한 경험에서 비롯되었다. 대륙과 영국, 음악과 미술을 넘나드는 인생 궤적을 그렸던 그가 말년의 노쇠한 몸으로 삶을 정리하는 단계에까지 와있다.


엘리자베스와 대니얼이 그랬던 것처럼 개인의 역사는 타인에 전달될 때 끊기지 않고 이어질 수 있다. 잊혔던 유산은 다시 발견될 수가 있다. 미술사학자에게도 생소하던 '폴린 보티'란 인물이 엘리자베스 덕에 소생했고, 그녀는 대니얼의 작사곡을 알아보고 방송국에 클레임도 넣었다. 저기압과 고기압 기단이 만나 장마전선을 만드는 것처럼, 상호작용의 묘미는 두 세계가 만났을 때 무언가 생성된다는 점에 있다. 에너지가 발생되고 가사상태의 과거는 생명력을 얻으며 새로운 전개로 뻗어나가는 힘을 갖게 된다. 여기서 키워드는 '알아봄'과 '되살아남'이다.


교류에서 얻어 가는 건 각자 다르다. 대니얼에게 엘리자베스는 어린 날 동생의 대체재, 엘리자베스에게 대니얼은 아버지(또는 멘토)의 역할이었다. 대니얼은 평생 그를 옭아매었던 동생의 기억에서 마침내 자유로울 수 있었고 편히 눈을 감게 된다. 엘리자베스는 폴린 보티의 삶에서 지금의 시대정신, 자신의 시선이 향해 마땅한 방향을 제시받는다. 우리는 상호작용의 스파크가 어떻게 튈지 예측하지 못한다. 이런 측면이 그 가치를 더욱 풍성하게 만든다.


늦가을의 낙엽은 생의 덧없음을 고민하게 만든다. 이 불편함과 부딪혀 보려는 누구라도 고독과 무력감의 닫힌 회로를 맴돌게 될 것이다. 속 시원한 해결책은 없겠지만, 고립과 폐쇄로 견뎌내지 못한단 사실만은 분명하다. 안타깝게도 소설 속 영국 사회의 분위기는 분열, 단절과 같은 단어들로 묘사되고 있는데 작가의 문제의식은 바로 여기서 출발했던 것 같다. 작품에서 받은 감동에 힘입어 조금은 강한 어조로 말해본다. 우리는 서로에게 더 다가가야 하고 서로에 대해 더 알려 노력해야 한다. 서로의 점을 연결하며 시간이 규정짓는 근원적 한계에 함께 대항해야 한다. 이것이 존재의 하찮음을 극복하는 한 방법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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