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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수이 Feb 27. 2020

사는 게 숨이 차요.

<거인>(2014), 김태용 감독


집을 떠나 가톨릭 보호시설에서 지내는 고등학생 영재(최우식). 저 한 몸도 간수하기 버거운 마당에 어린 동생까지 제게 떠맡기려는 무책임한 아버지를 피할 수 있다면야 불편한 눈칫밥 생활 따위는 얼마든 참을 수 있다. 그렇게 최악보다는 차악이라는 심정으로 악착같이 살아가지만, 나이가 찬 영재는 이제 보호시설을 나가야 하는 상황에 처한다. 이대로 신학대학에 진학해 신부가 되는 길이 제가 안정적으로 자립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 생각하는 영재는 친구를 배신하고 동생을 외면하면서까지 어떻게든 보호시설에 남으려 발버둥치지만 바람과 달리 상황은 점점 악화되기만 한다. 구질구질한 가족, 친구, 그리고 자기 자신. 어떻게든 수면 위로 오르려 몸부림 쳐봐도 영재의 발에는 새로운 모래주머니가 하나씩 얹혀갈 뿐이다.




내가 책임져? 왜? 내가 전생에 무슨 죄를 지었길래.


그럼 난 어디로 돌아가?




글자 하나하나에 원망을 꾹꾹 담아 내뱉던 영재의 대사는 그를 지배하는 가장 큰 두려움이 ‘돌아갈 곳이 없다는 공포’임을 드러낸다. <부산행>의 프리퀄 애니메이션인 연상호 감독의 <서울역> 이 연상되는 부분이다. 몰려드는 좀비 떼를 피하고자 지하철 선로를 따라 하염없이 걷던 여주인공이 ‘너무 무서워요, 집에 가고 싶어요.’ 라며 펑펑 울자, 함께 도망치던 노숙자 할아버지는 말한다. ‘나도 가고 싶다. 근데 난 집이 없어.’ 돌아갈 곳이 없다니. 지금껏 한 번도 인지해보지 못한 공포에 마치 머리를 한 대 맞은 듯한 충격이었다.


이는 사회적 약자의 이야기를 다루는 두 영화의 공통된 매력이다. 두 작품은 관객에게 지금껏 생각해본 적 없는, 그저 ‘남 얘기’일 뿐인 서사를 전개해나가는데 그 과정에서 강렬한 체험을 이루게 만든다. 뛰어난 몰입감으로 러닝타임 내내 보는 이를 아주 불편하게 만드는 그 인물들은 영화가 끝난 후에도 관객의 가슴에 얹히고, 이때부터 약자의 이야기는 그 개인에게 있어 더 이상 단순한 남의 이야기가 아니게 된다. 이러한 사회적 공감과 관심의 실현은 영화의 놀라운 순기능 중 하나다.





 “최우식 배우는 그냥 서 있어도 무언가 안쓰러워 보인다, 배불리 먹고 금방 밥상에서 일어났어도 왠지 어딘가 영양이 결핍되어 있는 것 같다” 던 봉준호 감독의 말에 공감할 수 있던 작품이었다. <운명처럼 널 사랑해> 에서 철없는 부잣집 막내아들로 풋풋한 연기를 보여줬던 게 얼마 전 같은데, 어느 순간부터 다른 장치 하나 없이 오로지 연기력만으로 보는 이의 눈물을 터뜨리는 배우가 되어있는 최우식. 티 하나 없이 밝은 인물 보다는 <기생충>의 기우나 <거인>의 영재처럼 어딘가 그늘진, 눈물나는 사연을 가진 인물이 더 잘 붙는 듯한 느낌인지라 영화를 보며 그가 착실하게 쌓아 온 필모를 함께 쭉 따라가보고 싶다는 생각이다.






‘사는 게 숨이 차요.’ 개인적으로 위의 포스터 때문에 관람을 결정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강렬한 인상을 남겼던 문장이었다. 이동진 평론가의 말대로 <거인>은 성장영화도 청춘영화도 아니다. 아주 적나라하고 참혹한 재난 영화다. 결국 영화가 끝나는 순간까지 영재는 한 번도 편히 숨을 쉬지 못했으니까.



#19.06.09 관람

  20.01.17 재관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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