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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박 Jun 29. 2022

수사할 수 없는 범죄

당신의 개인 정보 안녕하신가요?


지난주에 이상한 메시지를 여러  받았다. 해외 직구 상품 수령을 위해 개인통관 고유부호를 입력하란 문자였다. 문자에 첨부된 링크는  누르는  좋다고 배웠기 때문에  메시지를 가볍게 무시했다. 하지만 반복해서 계속 도착했다. 게다가  이름  자가  박혀서 오는 메시지라서 어딘가 석연치 않았다. 용감하게 링크를 클릭했다. 인적 사항을 기입하는 칸이 나왔고 고유 통관 부호를 적으라고 했으며, 하단에는 '내가 구매했다고 하는' 물건의 종류가 영문으로 기재돼 있었다. 5기가 랩톱 메모리? 곧장 취소를 눌렀다. 다른 문자의 링크를 눌러보니 웨딩 링이 있었고  다른 문자의 링크에는 정체를   없는 영문이 적혀 있었다. 그러니까 지금  이름과 번호로 보내지도 사지도 않은 물건이 오고 있다는 걸까??




 관세청에 전화를 했다. 그간의 불편한 상황을 설명하며 상담원이 원하는 대로 문자 속 송장 번호를 불러주었다. 그는 내 개인 통관 고유 부호가 유출됐으며 몇 개 품목은 아직 세관에 들어오지도 않았지만 반지 다섯 개는 이미 P 세관에 들어와 있으니 그곳으로 연락을 해보라고 했다. 개인 통관 고유 부호는 1년에 다섯 차례 재발급이 가능하니 이번에 다시 발급받아 둬야 더 큰 피해를 줄일 수 있다고 변경 방법을 친절히 안내해 주었다. 그의 말대로 하고 P 세관으로 전화를 걸었다.




 세관에서도 송장번호를 불러달라고 했다. 메모를 통해 그 물건이 구매자에게 가지 못하도록 조치를 취해준다고도 했다. 그러면서 2차 방지를 위해 경찰서에 민원을 넣을 것을 조언하였다. 경찰청 민원 182에 전화를 걸었다. 자초지종을 들은 상담원은 관할 경찰서에 가보라고 했다. 이쯤 되니 정말 귀찮았다. 바빠도 너무 바쁜 나인데 꼭 거기까지 가야 할까. 돈을 잃은 것도 아니고 물건을 받은 것도 아닌데. 하지만 문득 드는 생각은 어쨌든 이것은 범죄이며, 잘못을 저지른 사람은 벌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관세청 직원은 만약 내 개인 정보를 빼돌린 자들이 내게 관세를 물게 할 수도 있으니 혹시 고지서가 나오면 납부를 하지 말고 바로 연락을 달라고 말한 바 있다. 금전적 피해가 앞으로 오지 말란 보장도 없게 된 것이다. 결국 경찰서로 향했다.




 경찰서에 도착해서 번호표를 뽑고 차례를 기다렸다. 또, 상황 설명이 시작되었다. 앵무새처럼 말하는 도중에 나름의 요령이 생겼는지 집약해서 정확하게 말하게 되었다. 하지만 경찰서에서는 말로 그치는 것이 아니었다. 진정서를 써야만 했다. 말과 글은 또 달랐다. 글로 설명하려니 어딘지 힘들었다. 그래도 열심히 적었다. 정확한 증빙을 위하여 날짜와 시간까지 적었다. 내 진정서를 훑어보던 담당자는 더 깊은 방에 있는 자기 상사를 호출했다. 그와 머리를 맞대고 십여 분을 고심하더니 내게 답변을 내놓았다.




"이런 일은 처음이라서 잘 모르겠습니다. 범죄를 특정해야 하는데 특정할 법적 자료가 없어요. 잠시만 더 기다려 주세요."




 이것은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일까. 개인 정보를 탈탈 털어 사지도 않은 상품을 샀다고 하고, 이름이 '개인 통관 고유 부호'인데 전혀 고유하지 못하게 만든 악의 무리가 있는데 범죄를 특정할 수가 없다니.


사이버 범죄 수사대로 가야 한다, 지능범죄 수사팀으로 가야 한다 두세 사람이 설왕설래하는 가운데 몇 번의 전화를 거치더니 내게 따라오라고 말했다. 나는 출입증을 부여받아 4층으로 안내되었다. 그곳은 진짜 형사들이 있는 사이버 범죄 수사과였다. 그곳에도 안내를 맡은 사람이 있었다. 민원실에서 들고 올라온 서류를 훑어보는 남자 앞 둥근 테이블에 앉아서 비슷하지만 더 상세하게 분류된 문항에 답을 달았다.




피의자의 이름을 알고 있나요?

피의자는 친인척인가요?

피의자에게 얼마의 피해를 입었나요?

피의자의 거주지를 알고 있나요?


....




 거의 '모름'인 서류를 대강 작성해서 남자에게 주었다. 둥근 테이블을 떠나 사무실로 들어간 남자는 오륙 분 만에 다른 남자와 함께 나왔다. 그가 진짜 형사였다.




"선생님께서 혹시 택배를 받으시거나 금전적 피해를 당하셨나요?"


"아닙니다."


"선생님, 이곳은 사건을 수사하는 수사기관이지 피해 복구 기관이 아니에요. 그래서 선생님이 만약에 선생님 주소로 마약 같은 물건을 받으신 게 아니라면 이 정도의 일로는 수사가 불가능합니다. 선생님이 개인 정보를 유출당하신 것은 맞지만 누가, 언제 그랬는지 알기가 어려운 상황에서 범인은 특정할 수 없기 때문에 수사 자체가 불가능해요. 게다가 금전적인 피해도 없었고요. 그래서 이 사건은 수사권도 없고 진정을 넣어도 기각될 것입니다. 죄송합니다."




 수사관의 말은 알알이 귀에 박혔다. '이곳이 아닙니다'라는 말이 특히 그랬다. '수사 기관'이란 단어로 이곳을 규정하고 나니 내가 극성스럽고 우스워 보였다. 약국에 와서 미역을 달라고 한 꼴이었다. 억울한 마음도 들었다. 나는 단계를 밟아서 왔다. 관세청에 전화 걸었을 때 제대로 안내가 되었더라면 이렇게 몸소 허무를 체험하지 않아도 됐을 것이다. 아니면 P 세관에서 말해줬어도 좋았다. 관세를 피해 타인의 정보를 도용해 물건을 들여오는 사례가 지속적으로 있으나 범인을 특정하기가 어려우므로 개인 통관 번호를 자주 변경하는 수밖에 없다, 이미 들어온 물건에 대해서만 조치하겠다고.


하지만 모두들 내게 경찰서로 가라고 했다. 그래서 온 것이다. 수사관의 말이 이해는 가지만 지금 이 둥근 테이블에 앉아서 무지한 민원인을 안타깝게 여기고 있는 그의 눈에 비칠 내 초라한 모습에 대해 자꾸만 생각했다. 순서대로 했는데 레시피 자체가 불량이라 실패한 요리 테이블 앞에 서 있는 기분이었다. 내가 받은 피해는 있는데 그 부당함을 어디에도 말할 수 없다는 것이 억울했다.




"하지만 저는 어떤 절차를 밟아서 여기에 온 거예요. 하다못해 1층 민원실에서라도 저에게 '경찰서는 수사기관인데 범인이 특정되지 않아서 올라가 봤자 소용이 없다, 따로 연락 준다'라고 말했어도 제가 낭비하는 시간이 줄지 않았을까 싶어요."




 어깃장을 놓거나 떼를 쓰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다만 한마디라도 나는 시스템에 의해 여기까지 왔음을, 개인 정보가 유출돼 쓰린 속이 여기 와서 더 쓰리게 되었음을 당신이 아는지 묻고 싶었다. 그리고 누군가 말해주었으면 했다. 왜 나는 여기에 올 수밖에 없었는지. 어쩌면 사과받고 싶었을지도 모르겠다.




"그 점은 같은 공무원으로서 미안하게 생각합니다. 다만 민원 센터는 거기에서 안된다고 하면 분쟁이 주로 발생하기 때문에 사건이 특정되면 수사권에 대해서 더 알고 있는 저희 형사들에게로 민원인을 보냅니다. 선생님을 괴롭히려고 한 일은 아닙니다."




 분노가 치민 건 아니었지만 씁쓸함이 가시질 않았다. 기실 수사관이 잘못한 일도 아니었다.


 귀찮았을 때 그냥 둘 것을 어떠한 정의감에 불타 여기까지 왔는지 어처구니가 없을 뿐이었다. 평소에 투철한 신고정신을 가진 사람도 아니었다. 별일도 아닌데 파출소에 신고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왜 공권력을 저렇게 낭비하는지 혀를 차던 사람이었다. 경찰서라는 곳은 어지간해선 절대로 오고 싶지 않았다. 운전면허증을 재발급받으러 오는 길조차 야릇한 두려움에 떨었던 곳이었다. 게다가 난 바빴다. 맨 처음 문자를 받았을 때부터 경찰서 주차장에서 빠져나오는 순간까지 그렇게 시간이 많이 걸릴 줄 알았다면 아예 오지 않았을 것이다. 저녁때를 훨씬 넘겨 집으로 돌아오니 딸 애가 저녁을 굶은 채 체육관에 가고 없었다. 개인 정보가 털린 게 아니라 나의 하루가 메말라 탈곡된 기분이었다. 털어보니 쭉정이만 남은 겨와 같았다. 나는 무엇을 했던가. 이곳은 수사기관이지 피해 복구 기관이 아니라는 말이 오래도록 맴을 돌았다.






'사람들에게 알리는 게 좋지 않을까?'


 며칠 멍한 상태로 있다 보니 그런 생각이 들었다. 아무도 수사해 주지 않는 범죄. 그러나 분명히 나쁜 일임에 분명하다. 돈이 오가지 않았지만 나는 피해자가 확실하다. 범인이 누군지 몰라서 아무것도 할 수 없다면 나 같은 피해자가 생기지 않도록 막는 게 더 투철한 정신 아닐까? 유출하려 들어도 계속 막히면 범죄자들도 별 수 있을까?


나는 그 길로 사람들에게 알리기 시작했다. 해외 직구를 한 번이라도 한 사람이라면 수일 내에 개인 통관 고유 부호를 변경하는 게 좋다고, 그 번호는 일 년에 다섯 번을 바꿀 수 있으니 매주 해외 직구를 하는 게 아니라면 거래 후에는 변경해 두라고 말해주었다. 나 같은 일이 없으란 보장도 없으며, 이것이 슬슬 움트는 수법이라면 빨리 차단되어야 더 이상의 범죄 행각이 없을 게 아닌가.




 인터넷 카페도 이용했다. 지역 맘 카페와 독서 카페에 경험담을 올렸다. 내 이름이 기재된 곳과 송장 번호 끄트머리는 블러 처리를 했다. SNS에도 적었다. 팔로우가 많은 것은 아니지만 누구라도 본다면 조심하는 데 도움이 될 것 같기 때문이다.


 정보를 좀 더 찾다 보니 시키지도 않은 물건이 집으로 배달되는 사례도 있다고 했다. 물건을 보내고 리뷰를 쓰게 함으로써 리뷰를 보고 구매하는 소비자의 심리를 교묘하게 이용하는 수법이라고 한다. 그러니까 구매율을 높이기 위해 벌이는 자작극. 그보다는 더 큰 범죄로도 얼마든지 남의 정보를 활용할 수 있다고 한다.


 우리는 전자 상거래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이젠 연령과 관계없이 인터넷으로 손쉽게 물건을 사고파는 시대다. 하다못해 식당에서 밥을 먹어도 웨이팅을 위해 전화번호와 이름을 남기는데 유출하려고 하면 손바닥 뒤집듯 악용할 수 있는 게 현대의 삶이다. 그렇다고 아무나 내 정보로 무엇이든 하도록 놔두는 것은 더 많은 범죄를 양산하는 일이다. 이번 기회에 나도 확실히 알았으니 해외 직구를 하든 해외에서 카드 결제를 하든, 국내에서 어떤 이벤트에 참여하든 내 정보에 대해서 잘 알고 미연에 유출이 되지 않도록 해야겠다. 더불어 내 글을 본 뭇사람들에게도 해외 직구 경험이 있다면 즉시 통관 번호를 변경하길 추천한다. 그리고 구매한 적이 없는데 해외에서 내 이름으로 도착한 물건이 있다면 뜯지 말고 관세청에 전화해 보기를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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