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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박 Jul 22. 2022

열무김치 안 주셔도 되는데요?

"열무김치 담그고 있으니까 이따가 전화하면 지하주차장으로 내려와 한 통 담아다 줄게."


오랜만에 쉬는 날이라 집안일에 한창 빠져 있는데 엄마께 전화가 왔다. 열무김치는 김치냉장고에 한 통 가득 들어있었다. 하지만 그냥 알겠다고 하고 끊은 것은 어차피 엄마는 열무김치를 담그는 중이고, 나를 주려고 하고 있고, 나는 열무김치를 좋아하는 데다가 이게 진짜 이유긴 한데 거절하면 서운할 게 뻔하기 때문이다.


분홍빛이 돌게 담근 연한 열무김치는 더위로 다운된 나의 입맛을 돋우는 여름철 최고의 음식이다. 국물이 빨간 열무김치는 밥반찬으로 먹고, 연한 국물 열무김치는 밥에 비벼 먹는다. 식당에 가서도 밑반찬으로 열무가 나오면 지인들은 으레  앞으로 접시를 옮겨줄 만큼 나는 열무 러버(lover).


가장 맛있는 건 당연히 우리 엄마가 담근 김치. 하지만 내가 아무리 열무김치를 좋아한대도 한 달에 한통을 혼자 다 먹기는 무리가 있다. 게다가 요즘 일이 많아 외식이 잦아지면서 열무를 자주 먹지 못했다. 최근엔 엄마가 한 통을 담아주기 전에 시어머니가 먼저 주시는 바람에 그걸 먹느라 엄마 김치는 아직 열어보지도 못한 상태였다.


그걸 아는 남편은 이제 누가 열무김치 준다고 하면 받아오지 말라고 했다. 알겠다고 했지만 미리 말해 놓지 않은 이상 이미 담기를 시작한, 그래서 곧 가져다가 주겠다고 한 엄마의 다소 신난 말투 끝에 '엄마, 김치 주지 마셔'라고 말할 수 없었다.


애초에 엄마가 열무를 사러 시장에 가기 전에 내게 말을 해주었으면 좋았을 것이다. 김치 담그려고 하는데 너 아직 먹는 것 있니, 좀 더 있다 할까 물어봐 줬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엄마는 묻지 않았고, 당신 홀로 계산하여 담갔다. 뭐하러 담갔냐고 말하면 서운해할 것이다. 곧잘 그랬다.


여하튼  나는 엄마에게 한 통의 열무가 있노라 말하지 않고 우선 김치냉장고에서 잠자는 엄마의 열무를 덜어내 따로 익힌 후 잠시 열정이 식은 열무 러버의 길에 박차를 가하려고 했다. 하지만 남편은 나의 이 결심을 몰랐다.


일찍 퇴근을 한 남편과 장을 보고 나오는 길이었다. 진동으로 해두는 바람에 전화를 못 받았더니 엄마는 사위에게 전화를 걸었다.  다짜고짜 10분 후에 내려오라고 했고, 남편은 어리둥절해 이유를 물었다. 열무김치를 주러 가는 중이라는 장모님에게 남편은 대답했다. 천진하고도 합리적인 이유에 진심을 담아서.


"장모님, 저희 열무김치 안 주셔도 돼요."

"뭐?"

"저희 열무김치 많아요. 지난번에 주신 것도 안 먹었어요."


운전을 하던 나는 너무 깜짝 놀라서 남편을 툭 쳤다. 핸들을 놓쳐서 얼른 다시 잡느라 가슴을 쓸었다. 내 입에서는 나도 모르게 "아이씨"라는 말이 튀어나왔다. 남편은 놀라서 나를 쳐다보고 수화기에 "잠깐만요"라고 이야기했다.


나는 얼른 집 쪽으로 차를 몰면서 이미 약속한 거니까 오시라고 하라고, 10분 안에 도착한다고 말했다. 남편이 그대로 전하고 전화를 끊었다.


"여보, 우리 집에 열무김치 많잖아. 지난번에 먹던 건 한 번 버리기도 했고."

"그건 어머니가 어디서 얻어다 주신 건데 정말 맛이 없었잖아, 짜고. 그래서 먹다가 버린 거고."

"그래 그건 그렇다고 치지만 지금도 김치냉장고에 장모님이 주신 거 그대로 있다고."

"알아, 근데 이미 엄마가 담갔잖아. 다음에 미리 말하고 담그시라고 이야기하면 되지, 그렇다고 오고 있는 엄마에게 김치 필요 없다고 말하면 그냥 돌아가시라는 말 밖에 더 돼?"

"아니 그러니까 당신이 애초에 엄마가 김치 담근다고 하실 때, 우리는 필요 없다고 말씀드렸어야지."

"엄마가 애초에 내게 묻고 준비한 게 아니잖아. 이미 열무 사다 다 손질해 두고 양념 붓기 직전에 전화하셨는데 안 먹는다고 하면 엄마가 너무 실망스럽지 않겠어?"



집으로 오는 내내 남편과 나의 의견은 전혀 좁혀지지 않았다. 남편의 말도 맞고 내 말도 맞다. 내 말에 더욱 힘을 싣기 위하여 엄마 집 냉장고는 너무 작아서 보관할 곳이 없고, 우리 집 김치냉장고에 넣는 게 더 낫기에 빨리 가져오는 거지, 두고두고 먹으면 된다는 말을 덧붙였다.


친정엄마에게 김치 한 통 받는데 남편이랑 무슨 설전까지 벌이는가 의아한 사람도 있을 것이다. 남편이 나보다 냉장고 관리를 더 잘한다고 말하면 까닭이 될까? 남편은 가지런히 정돈된 것을 아주 좋아한다. 설거지 후엔 그릇도 가지런히 켜켜이 쌓고, 반찬 통도 뚜껑을 찾아 씌워 가지런히 정돈해 둔다. 나는 그릇 사이의 습기를 싫어해서 설거지 그릇도 지그재그로 쌓고, 반찬통 뚜껑은 열어서 장에 보관한다. 남편은 가끔씩 수납장을 열어 모두 닫아 두면서 잔소리를 한다. 대체 왜 그릇을 죄다 열어두느냐고, 이렇게 하면 제 때 찾아 쓰기 힘들다고.

냉장고도 마찬가지여서 나는 넣고 싶은 곳에 넣지만 남편은 무거운 것은 세 번째 칸으로 내리고 가벼운 것만 위로 넣되, 있는 음식은 모두 먹어치워 자리를 비우는 것에 지독한 사명감을 갖고 있어서 오랜 기간 보관해도 되는 장류나 장아찌류까지도 빨리 먹어치우라 성화다. 이쯤 되니 평소에도 정리 정돈으로 아웅을 다투는 부부를 상상할 수 있을 터.


주차장에서 만난 엄마는 김치만 주고 돌아갔고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오는 내내 남편의 얼굴은 잔뜩 굳어서 떠맡기 싫은 애완동물을 보듯이 엄마의 김치통을 바라보았다. 나는 멀어지는 엄마의 차를 가만히 보다가 같이 올라탄 엘리베이터에서는 김치통을 향한 남편의 근심 어린 눈길을 노려보았다. 한숨을 쉬며 김치냉장고에 열무김치를 밀어 넣는 남편에게 기어코 토라지고 말았다.



양푼에 고슬고슬한 밥을 한 주걱 넣는다. 턱, 하고 떨어지면서 더운 김이 서리고 모락모락 나는 김 위로 열무김치 한 젓가락이 떨어진다.  고추장, 참기름, 잘게 썰은 청양고추 약간과 아까 전에 미리 부쳐 놓은 반숙 프라이까지 올린다. 준비는 끝. 양푼을 끌어안듯이 붙잡고 수저로 엎어뜨리고 메치며 밥을 비빈다. 코끝에 감도는 맵고 고소하지만 달큰한 냄새는 익숙한 맛을 금방 소환해 허기를 깊게 만든다. 야무지게 비비고 있는데 슬그머니 숟가락 통에서 덜그럭 소리가 들린다.


"안돼. 당신 안 먹는대서 일 인분만 비볐어."

"아, 한 입만. 나 딱 한 입만 먹을게."

"안돼. 나 한 입만 너무 싫어해. 나 먹고서 비벼 줄테니까 기다려."


아싸를 외치며 청양고추를 썰러 가는 남편을 보면서 한 숟갈 가득 뜬 밥을 입에 욱여넣는다. 입 가장자리에 고추장 양념이 묻어도 개의치 않는다. 가장 맛있는 여름의 맛. '사각' 하고 청량한 소리는 덤이다.


서둘러 두 번째 숟가락을 뜨면서 사진을 찍었다. 입에 가득 찬 밥을 씹으며 엄마에게 사진을 전송한다.


"엄마, 열무 너무 맛있어. 지난번에 주신 게 잘 익었어. 이거 다 먹으면 또 말할게. 그때 담가 줘요."


내일은 비빔면에 열무를 올려서 엄마께 보내볼까? 생각하는 사이, 남편이 도저히 못 참겠다며 내 양푼에 숟가락을 들이댔다. 결국 우리는 사이좋게 퍼 먹고 또 한 번 비벼 먹었다. 여전히 여름은 맛있고 열무는 천천히 익는다. 엄마의 사랑도 같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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