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이라는 형태는 바꼈지만, 본질은 같지 않을까
올해에도 그렇듯, 둘 다 결혼기념일을 잊어버리고 말았다.
처음 두 번의 결혼기념일은 부케를 받아준 친구가 알려주었고, 그 다음부터는 동생이 알려주었다.
올해도 다르지 않았다. 남편과 마라떡볶이 얘기를 한창하고 있는데 동생으로부터 문자가 왔다.
"결혼기념일 축하해 언니, 형부!"
아.... 매년 까먹지 말아야지 했는데, 또 까먹고 말았다.
하지만, 그래서 그와 잘 맞는다. 우리 둘은 기념일이고 뭐고, 크게 관심이 없다. 그래서 좋다 이사람이.
남편과 나의 관계를 한 마디로 정의하자면, 하나부터 열까지 다른데, 또 반대로 하나부터 열까지 비슷하다. 우리 둘은 성격, 말투, 목소리 톤, 행동 이 모든게 극적으로 반대 성향을 지니고 있다. 심지어 이를 반증하듯, MBTI까도 정반대 성향을 지니고 있다. 반대로, 어떤 현상이나 상황에 대해 바라보는 시각이나 생각은 이상할만큼 비슷하다. 한동안은 '우리가 잘 맞나?'라고 생각하고 살았었는데, 우연히 방 정리를 하다 찾은 7년전 일기를 보고는 우리는 원래부터 잘 맞았던 사람들이 아니라 '살다보니 생각 회로가 비슷해진 것'이라는 생각에 다다랐다.
7년전이면 우린 아직 연애를 하고 있을 때였고, 일기에 따르면 우리는 별거 아닌 일로 크게 말다툼을 했던 것 같다. 짧게 정리하자면, 어떤 상황에 대해 자기가 희생하고 손해보는 한이 있더라도 자기가 무언가를 안고 가겠다는 남편과, 왜 그래야하는지 분통을 터뜨렸던 나와 한참을 대립했던 것 같다. 합의점을 찾지 못했던 우리는 결국 '오빠 일이니까 오빠가 알아서해'하고 나는 그 일을 내 뇌리에서 지우기로 했고, 놀랍게도 7년이 지난 지금까지 그 일에 대해 단 한번도 둘이 이야기는 커녕 그날의 일에 대한 키워드조차 언급해본 적이 없었다.
7년이면 그때 그 감정이 누그러지기에는 충분한 시간이라 생각해서 남편에게 운을 띄어보았다.
- 나: 오빠, 7년 전에 그때 그거 기억나?
- 오빠: 응. 기억은 나지. 갑자기 왜?
- 나: 방 청소하다가 일기를 찾았어. 그때의 난 와이프도 아닌데, 왜 그렇게 예민하게 굴었지? 웃기지?
- 오빠: 아냐. 뭐 그럴 수도 있지.
- 나: 근데 지금 생각해보면, 그렇게 큰 손해도 아니였는데 그때는 왜 세상 끝날 것처럼 짜증냈을까?
- 오빠: 난 반대로, 이제는 내 가족이 생겨서 그런걸 수도 있지만... 나도 좀 무모했던 것 같아
- 나: ...응?? 그럼 지금이었으면 어떻게 했을거 같은데?
- 오빠: 너와 내 생각의 중간점을 찾아서 행동했거나, 아님 더 도움이 될만한 누구를 소개시켜주지 않았을까?
'중간점'. 별 의미가 있는 단어가 아닌데, 순간 뭔가 머리에 쿵 하는 느낌이 들었다. 우리가 함께한 시간만큼, 서로가 조금은 스며들었다라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또, 우리가 가족이 되어가는구나 하는 생각도 들어서 벅찬 마음이 들기도 했다.
사실 연애할때는 나와 극과 극으로 다른 것 같은 그의 모습들에 끌렸고, 그에게 끌리는게 어떤 벗어날 수 없는 하지만 엄청나게 매력적인 흑마술에 휘둘리는 것과 비슷할 지도 모른다(물론 흑마술을 경험해본적도 경험해 볼 마음도 없다)고 생각할 때도 있었다. 그게 사랑이라고 생각했다 - 특별하니까. 해서, 연애 초반에 가장 많이 읽고 공감했던 책이 무라카미 하루키의 <여자 없는 남자들> 이었다.
하루키의 책 <여자 없는 남자들>에 보면 이런 구절이 나온다.
"사랑한다는 것은 원래 그런 것이다. 자기 마음을 컨트롤 할 수 없고, 그래서 불합리한 힘에 휘둘리는 기분이다. 즉, 당신은 딱히 일반 상식에서 벗어나 이상한 체험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 그저 한 여자를 진지하게 사랑하는 것 뿐이다"
나는 컨트롤 할 수 없고 속절없이 매력의 블랙홀로 빠지는게 사랑이라고 생각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낯간지럽고 쟨 왜저랬나 싶지만..그 당시엔 그게 맞다고 그렇게 믿었고, 그렇게 믿었고, 어렸고, '미쳤어서' 결혼했던 것 같다.
하지만, 결혼해서 살다보니.. 어른들 말씀처럼 결혼은 '현실'이었다. 사랑이 밥 먹여주지 않는다는 어른들 말씀처럼 우리의 결혼생활도 모두의 결혼생활처럼 쉽지 않았다. 반대여서 끌렸던 점들이 번거롭고 짜증나기 시작했고, 왜 이사람은 이러는거지, 왜 이사람은 이렇게 생각하지, 왜 이사람은 이렇게밖에 행동하지 못하지 등등 '왜 이사람은~?'이라는 질문을 수 없이 하기도 했었다.
서로 참고 참고 참다가 폭발해서 싸운 날도 있었고, 각방을 쓴 날들도 있었다. 가끔은 목소리조차 듣기 싫어서 노이즈캔슬링 이어폰을 꽂고 있을 때도 있었다. 그렇게 미운 짓만 골라서 하던 내가 정신을 차리게 된 계기가 있었는데 그건 바로 유호진PD의 글 이었다.
아마 우리 나이때 분들은 유호진 PD를 '1박 2일'를 이끈 PD로 잘 알것이고, 조금 아래 나이때 분들은 '어쩌다 사장'의 PD로 아실 것 같긴 한데.. 여튼 인터넷에서 우연히 그분이 2013년에 페이스북에 쓴 글을 봤다. 연애와 결혼에 대한 글이었는데, 이 글을 거짓말 안 하고 그 자리에서 5-6번을 연속으로 읽고 또 읽었던 것 같다.
우선 두 가지 생각이 떠올랐는데, 첫번째는 "역시 참 글을 잘쓰는 사람이구나"와 "서로의 세상에 서로가 발을 들인다는 것은 무척이나 어려운 일인데..내가 너무 안일하게 쉽게 생각했었고... 그래놓고 왜 이제와서 '왜 이렇게 어려워?'하고 징징거리는 걸까?'하는 자기반성이었다.
위의 글을 읽어보면 이런 부분이 있다.
"실연이 없는 관계 - 결혼 생활이 시작된다면 그 모든 절반의 세계는 점차 단단히 나의 세계로 스며들기 시작할 것이다. 그건 굉장히 이상하고 기묘한 일일 거라고 생각한다. 그 세계의 리스트에는 그녀가 가져온 좋은 것과 문제점 모두가 포함된다. 그건 혜택과 책임으로 복잡하게 얽인 대차대조표라서 어차피 득실을 따지기가 어렵다. 세월이 감에 따라 그녀가 최초에 나에게 가져왔던 섬세한 풍경들의 윤곽, 디테일한 소품들은 생활이라는 것에 차차 혹독히 침식되겠지만, 그 기본적인 구성이 변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것들은 여전히 나와 몹시 다르고 다양해서 이따금 경이로울 것이다. 한 사람이 오는 건 그 사람의 삶 전체가 오는 것 이라는 말을 웬 광고판에서 본 적이 있다. 왜 아침에 그 문구가 생각났을까. 아무튼 사람을, 연인을 곁에 두기로 하는 것은 그래서 무척이나 거대한 결심이다"
저 부분에서 온 몸이 얼어붙는다는 느낌을 받았었는데... 내가 그의 세계에 발을 들이고 적응하느냐 힘들고 무섭고 외로웠던 것 처럼, 그도 나의 세계에 발을 들이고 적응하고 견뎌내느냐 무던히도 힘들고 무섭고 서럽고 외로웠겠구나 하는 생각이 뇌리를 스쳤기 때문이다. 그리고 하루 종일 그 생각만 났다. 회사 동료가 뭐라 하든 뭐가 터지든 손으로는 업무를 했지만 머리 속으로는 그 생각만 했던 것 같다.
너무 쉬운 논리를 나는 바보처럼 이 나이에 1도 깨닫지 못하고 있다가 너무 늦게 알아 버린 것이다
"상처받은 만큼, 나도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고 있다" 라는.. 너무 쉽고 간단한 진리를 나는 너무 몰랐다. 너무 무지했다.
그때부턴 맞추는것 보다 다름을 인정하기로 했고, 좀 더 그의 말과 그의 마음에 귀를 귀울이려 노력했던 것 같다. 설령, 그가 다소 난해하거나 빙빙돌려 말을 할때도, 나에게는 너무나도 재미없는 과학상식을 이야기 할때도 우선 아무말 하지않고 들어봤다. 계속 들어보니 한 가지 깨달을 수 있는게 있었다. 그 깨달음이 아마 우리 결혼생활을 다시 강하게 이어준 매개체가 되지 않았나 싶은데..그 깨달음은..
"그는 10년 전에도 지금도 항상 같았는데, 그를 바라보는 내 시선이 달라진거구나"
항상, 결혼하고 그가 바뀌었다 생각했고 그게 서운했는데, 사실 그는 여전히 같은 사람이고, 같은 것들을 좋아하는데 내가 바뀌어놓고 그가 바뀌었다 그가 못맞춰 준다 서운해했던 것이다. 우리는 어느 주말 하루 날을 잡고 부암동 동네를 3-4시간 걸으며 이런 부분들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말을 둘다 얼마나 많이 했는지 무려 2개의 다른 카페에서 다른 커피를 테이크아웃해서 마셔야할 만큼..많은 대화를 나누었다. 그리고 그걸 계기로 서로에게 좀 더 집중했던 것 같고..여전히 우리는 갈길이 멀지만..그래도 부부로서 연인으로서 가족으로서 많이 비슷해지고 더 가까워지지 않았나 싶다.
지금의 내가 그를 바라보는 사랑은..연애 초반에 설레고 마음이 뛰고 언제보지 설레는 그런 감정의 사랑은 아닌 것 같다. 지금 내가 그를 바라보는 사랑은 함께 해 줘서 고맙고, 같이 있어줘서 든든하고, 그가 진심으로 아프지 않고 행복하게 살았음 하는 감정의 사랑인 것 같다. 형태는 바뀌었고, 사랑의 강도가 변하긴 했지만, 그 사람이 좋고 그 사람이 잘됐으면 좋겠고, 그 사람이 행복했으면 좋겠는 사랑의 본질은 변하지 않았나 싶다. (그도 비슷한 마음이길..;;).
여튼 둘 다 마라떡볶이 얘기나하며 보낸 결혼기념일이었지만, 얼얼하고 매운 마라와는 다르게..큰 일 없이 별 일 없이, 평탄하고 순탄하게 또 한번의 결혼기념일을 보낸 우리.. 칭찬해! 다음 한 해도 잘 부탁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