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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지영 Mar 22. 2023

최지영의 연극놀이 이야기, 열두 번째

쪽지의 여왕에서 교육연극 세계로의 입문

 쪽지의 여왕에서 교육연극 세계로의 입문     


   1994년, '역할연기의 교육적 활용'에 관한 논문으로 석사과정을 졸업하면서, 나는 교육연극의 세계에 입문하였다. 이 논문은 우리나라에서 교육연극을 하나의 학문으로 인식하고 탐색의 길을 열었다는데서 의미를 찾을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그런데! 논문을 쓰기 전 나는, 연극연출자가 되고자 하는 이상을 품고 ‘극단 전망’의 창립단원으로 들어가 조연출과 무대감독으로서 경험을 쌓고 있었다.         아~ 옛날이여~~~~     


   창단작품, 정복근 작 <표류하는 너를 위하여>(1989년이 아마 맞을 것이다)를 시작으로 무대와 공연 제작과정을 익혀나가고 있었다. 연습 기간에는 조연출로, 공연 기간에는 무대감독의 역할을 수행했다. 그 당시, 배우들이 내게 붙여준 별명이 있었다. '쪽지의 여왕'. 그 이유는 매 공연이 끝난 후, 연습 과정에서 합의한 내용들, 공연 도중에 발생한 문제들, 배우들이 생각할 거리 등을 포스트 잍에 적어서 배우들 자리에 붙여놓았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황당해하며 쳐다보시던 배우분들이 나중에는 "오늘은 내 거 없어?" 하며 찾던 기억들이 떠오른다. 이 기간에, 내게 연극은 어떻게 정리되었을까?    

 

  "작품과 배우와 스텝이 하나의 앙상블을 이루어서 관객을 만나는 작업이다. 관객을 만나기 위해서는 

   미학적으로나 메시지적인 면에서나 창작자 간의 완벽한 합의와 무대에서의 앙상블이 필요하며, 

   그래서 성실한 연습이 필요하다. 관객들을 만나기 위한 완벽한 작업을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      


   확실히 공연(theatre)을 기반으로 한, 보여주기 영역의 연극에 대한 세계관이 나를 지배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 와중에도 난, 연극이 연출 혹은 누군가의 카리스마로 지배되는 것이 아닌, 창작자 간의 앙상블을 통해 관객과 만나는 작업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그렇게 '쪽지의 여왕'으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하려 했던 것 같다. 완벽한 합의와 앙상블을 최대한 독려하고 유지하는 것이 나의 역할이라고 생각했기에.  그런데, 내 역할에 과부하가 걸리기 시작했다. 작품은 사라지고 쪽지만 남게 되었다. 경륜 있는 배우들을 ‘쪽지의 여왕’으로 통제(?)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극단에 들어오면서 품었던 연구에의 열망은 오로지, 역할을 수행하기 위한 오기로 점철되기 시작했다.     


   그래서! 난 과감히 극단을 나와 대학원에 입학했다.      


   대학원 입학 면접 때의 질문이 생각난다. "연극이론 공부하려고 하는 거죠? " 

  "아니요, 저는 현장에서 연출하고 싶습니다." 이렇게 당당히 대답했다. 1990년 9월부터 대학원 과정을 시작했다. 지금은 돌아가신 안민수 선생님의 수업을 통해서, '연극을 관통하는 힘'에 대해 영감을 받으며, “그래, 내가 저 힘을 찾아낼 것이다.”라는 의지를 불태우고 있었다.  

   그런데 내가 교육연극에 입문하게 되는 결정적인 계기를 제공하는 사건이 일어나게 된다.  대학원 실습 공연의 연출로 이제 1학기 생인 내가 결정된 것이다. 왜 그랬을까? 지금에서 생각해보면, 이건 선배들의 농간(?)이었다. 가장 만만한 1학기 생을 연출이라는 명목으로 앉혀놓고 온갖 잔소리와 실력행사를 해대기 시작했다. 작품 자체에 대한 기억보다는, 선배들 사이에서 힘이 없는 나에 대한 실망과 분노가 나를 뒤덮었다. 그 실망과 분노는 날 심한 열병으로까지 몰고 갔던 고통의 시간이었다. 연출을 포기하지 않고, 공연을 끝마치긴 했지만, 내가 마치 연극지진아가 된 것 같았다. 


  그때까지 내게 연극은 '공연' 그 자체였다. 하나의 무대공연을 만들기 위한 모든 과정이 응축된 예술 형태. 그리고 그 '공연'을 위해서는 작품에 대해 관통하는 힘을 가져야만 하는, 프로페셔널한 전문가의 세계!     


   ‘연극지진아’로 날 규정하자, 더 이상 연극을 할 수 없었다. 그래서 휴학하고, 그 당시 시작된 해외여행 자유화의 물결에 휩쓸려 유럽 여행을 떠났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졸업은 하고 싶었다. '브레히트'를 주제로 논문을 쓰겠다고 마음먹고, 다시 복학하고 들어간 수업에서, '드라마 테라피'라는 용어를 들었다. 돌아가신 김흥우 교수님이 잠깐 흘리신 표현이었다. 그런데 그때부터 '드라마 테라피'라는 말이 귓가에서 떠나질 않았다. 내게 연극은 너무나도 고통스러운 기억이고, 그저 버텨내는 것만이 지상 과제였는데, 연극으로 치료된다고? 어떻게?  그때부터, 제작과정으로서의 연극이 아닌, 연극이 가진 본질에 대한 탐색이 시작되었다.    

  

   우리가 통으로 '연극'이라고 부르는 영역(세계) 안에는, 관객과의 만남을 통해서 완성해나가는 무대 제작과정으로서의 공연(theatre)이 존재한다. 그러나 이와 함께, 내가 아닌 다른 존재가 되어보는 행위, 그 자체에 집중하는 드라마(drama)의 세계 또한 존재한다는 것을 깨달아 알게 된 것이다. 실제로 극적 행위는 인류와 함께 시작되었고, 누구에게 보여주기 이전에 하나의 놀이로, 공동체의 집단의식으로 존재해왔던 것 아닌가? 우리가 희곡(drama)이라고 명명하던, 그 수 많은 대본도 곧, 행위의 점철 그 자체로서, 배우들이 움직이게 하는 출발점이지 않은가? 물론 희곡을 아직도 하나의 성전으로 인식하며 그대로의 재현을 목표로 하기도 하지만, 그 이전에 분명 희곡은 배우들의 행위를 통해서 완성되는 행위의 예술이자, 하나의 문학 장르로서도 존재하는 것 아닌가! 이러한 탐색의 과정에서 '교육연극(Educational drama & theatre)'라는 구체적인 학문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기뻤다.     


  나는 연극지진아가 아니며, 연극이 가지는 좀 더 많은 가능성의 기회를 얻지 못했던 것이었고, 연극과의 관계 속에서 또 다른 가능성을 만들어갈 수 있겠다는 새로운 인식을 하게 되었다. 연극을 극장에서뿐만 아니라, 교실에서, 미술관에서, 병원에서, 사람들이 모여있는 광장에서, 지역사회에서, 어디서든지 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또한 극장을 찾아오는 관객뿐만 아니라, 어린이 청소년들과 노년 세대와 직장인들과 장애인들과 지역사회 주민과 도서관을 찾아오는 이용자들을 포함한 수많은 대상과 할 수 있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나의 초등, 중등 시절의 연극 체험들과 20대 때의 교회학교 교사로서 온전히 연극을 탐색했던 시간이 결코 우연이 아니었음도 알게 되었다. 내가 어린아이처럼 순수하게 탐닉했던 연극 체험의 시간이 결국은 나를 이 길로 이끌고 있었음을 마주하게 된 것이다.      


   그러고 보니 생각나는 일화가 있다. 대학원에서 자유주제를 가지고 발제하는 시간이 있었는데, 난 이때, 교회의 역사 속에서 연극이 어떻게 소개되고, 활용되었는지를 추적해 발표했다. 이 발표가 흥미로우셨는지, 발표를 들은 안민수 교수님께서 “지영이는 교회연극을 한번 해보지 그러니?”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난 그때, 연출자로서 기존연극 현장에 뛰어들겠다고 마음먹고 있었다. 그래서 선생님의 말씀이 왠지 서운하고, 내가 연출자로서 부족하다는 의미인가, 혼자 짚어내며 속상해했었다. 그러나 후에 내가 교육연극으로 논문을 쓰게 되면서, 이미 선생님께서는 내 안의 가능성과 필연적인 여정을 이미 잡아내신 건 아닌지 생각해보게 되었다. 실제로 안민수 교수님은 이런 주제를 선택한 나를 무척 반가워하셨다. 새로운 탐색의 길을 도전하는 제자를 진심으로 응원해주셨다. 선생님의 생각을 내게 주입하게 시키기보다는 내가 이 논문을 통해서 탐색하고 정리하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를 끊임없이 질문하게 하셨다. 그러한 질문과 탐색의 결과를, 역할연기의 교육적 활용에 관한 연구’ 논문에 담아낼 수 있었다. 이 논문은 연극·영화학과에서 공식적으로 발표된 제1호 교육연극 관련 논문이 되었다. 논문을 쓰는 기간이 내게는 다시금 연극을 발견하게 하는 시간이었고, 이 시간을 통해 연극에 대한 열정을 회복했다. 이렇게 나는 교육연극의 세계에 입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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