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하기는 어디로부터 시작하는가
예술하기란 어디로부터 어떻게 시작되는 걸까?
이 질문을 탐색하기 위해 <태도가 작품이 될 때> (박보나, 바다출판사 2019)를 만난다. 예술하는 인간으로서, 예술가들은 자신이 탐색하는 것에, 저돌적이라고 생각한다. 앞뒤 보지 않고, 탐색하고, 표출한다. 하긴 그것이 예술의 덕목이 아닐까? 예술을 한다는 것은, 어떤 윤리적인, 논리적인 틀에 매여있기보다는 예술가의 원천으로 끝닿아보는 작업이지 않은가!
그런데 나부터도 그렇고, 그러다 보니 맹목적이 되는 경향이 있다. 순수하게 내달려 보지만, 그것도 어느 한계에 다다르면, 도대체 내가 하는 것이 무엇인지 되짚어보게 된다. 바로 이럴 때, 작가들의 언어는 중요한 영감과 인식의 정리를 제공한다.
<태도가 작품이 될 때> 이 책에서, 작가는 왜 ‘태도’라는 단어를 쓴 것일까? 상상이, 개성이, 취향이, 특성이 등이 작품이 될 때가 아닌, ‘태도’가 작품이 될 때라고 사용한 의도를 추적해본다. ‘태도’의 뜻을 사전에서 찾아보니,
명사
1) 어떤 일이나 상황에 직면했을 때 가지는 입장이나 자세
2) 어떤 대상을 대했을 때 드러나는 표정이나 몸짓 이라고 서술되어 있다.
태도라는 단어 자체는 명사이나, 태도의 속성은 그야말로 ‘동사’이다. 그저 담아두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표출하고 드러내고 행동한다는 것이 아닌가 말이다. 실제로 예술을 한다는 것은 매우 실존적이며 실천적인 행위이다. 붓을 잡고 그림을 그리고, 소리를 내어 노래를 부르고, 몸을 움직여 공간에서 춤을 춘다. 언어를 내 입에서 표출하며 주고받음으로써 한 편의 공연이 탄생하게 되는 예술이 성립되는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움직인다는 것은 이미 예술하기를 내포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우리의 움직임은 이미 일상과 예술을 모두 포함하고 있다.
작가는 총 17개의 목차를 던져주고 있다. 작가의 말을 인용하면, “이 책을 읽는 분들이 각자의 관점으로 세상과 글과 작품을 해석할 여지를 가졌으면 하는 바람”으로 이 목차를 제공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그중에서도 특히 더 7개의 목차에 주목하게 된다.
- 놀고, 떨어지고, 사라지려는 의지
- 더 시끄럽게 서로의 차이를 이야기할 수 있어야 한다
- 정직성, 정말 외로운 그 말
- 익숙한 것이 살짝 어긋날 때
- 그 어떤 똑똑한 생각보다 훨씬 위로가 될 때
- 사소하고 아무것도 보이지 않을수록
- 우리는 꽤 근사한 춤을 함께 출 수 있지 않을까
이 책의 표지이기도 한, 바스 얀 아더르의 <너무 슬퍼서 아무 말도 할 수 없어>라는 작품은 작가의 말처럼 “그저 서럽게 울고 있는” 사진이다. 보고 있으면 같이 울고 싶어진다. 이와 함께 <낙하>라는 작품과 <기적을 찾아서>라는 작품을 소개하고 있다. 내게는 떨어진다는 것은, 높이 날고 싶어하는 욕망의 도전, 전혀 끝을 알 수 없지만 그야말로 기적을 찾아 떠나보는 자유에의 의지, 온 몸 전체를 불사르는 아더르의 몸짓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 어떤 논리나 결과도 예측하지 않고, 바로 그 순간에 온 몸을 던져서 몰입하고, 그 순간을 던지는 행위, 그리고 그렇게 하고 말겠다는 처절한 선언으로 다가왔다. 결국, 아더르는 기적을 찾아 떠난 바다에서 돌아오지 않았다고 한다. 이를 정말 인생의 비극이라고 볼 수도 있겠지만, 아더르의 온 몸을 불사른 행위는, 자신이 누구인지, 어떤 감정을 느끼는지에 대한 자신의 실존을 온 몸으로 표현한 행위로 받아들여진다. 여기에 어떤 윤리적이고 도덕적인 잣대를 대고 싶지 않다. 아더르가 온 몸을 던져 표출하고자 한 자유의지에 나 역시도 최선을 다해 공감하고 싶다. 일단 예술하기란 아더르의 표출처럼, 온 몸을 던지는 자유의지라는 것을 기본전제로 생각과 인식을 시작한다.
이러한 자유의지의 전제하에, 차이에 대한 탐색, 익숙한 것을 살짝 비껴보는 태도, 사소한 것들 중에서 낯선 것을 볼 수 있는 감성, 그러면서도 우직하고 정직하게 나의 정체성을 파고들고자 하는 노력이 예술하기를 가능하게 한다는 지점을 도출해내어 정리해 본다. 그러고 보니, 나 역시도 예술교육가로서, ‘차이’에 대해, 일상을 낯설게 보기, 일상에서 발견하는 예술의 지점 등에 대해서는 많이 이야기하고 시도한 것 같다. 그런데, 나 자신부터, 그러한 길을 우직하게 걸어온 내 모습에 어떨 때는 회의를 느끼기도 하고, 지치기도 하면서 절망했던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그런데, ‘정직성, 정말 외로운 그 말’이라는 이 문장에서 어마어마한 위로를 얻게 된다. 그렇지, 아무리 힘들고 좌절해도, 그 어떤 뾰족한 수가 보이지 않는다 해도, 지금까지 내가 달려온 것이 헛되지 않았다는 위로 말이다. 내가 연극놀이를 하면서 이끔이로 쓰곤 하는 이름이 ‘표범의 심장을 가진 거북이’다. 거북이가 표범의 심장을 가지고 있으니 얼마나 쓰라리고 힘들겠는가! 하지만 거북이는 펄떡거리는 심장을 가지고 한 발 한 발 나아간다. 그것이 나라고 생각한다.
또 하나, 작가 한 명의 처절한 고백이, ‘예술하기’라는 공동체 체험을 통해 하나의 경험이 되고, 회복됨을 발견한다. 나 역시도, 늘 누군가에게 나의 에너지를 쏟아내는, 나의 에너지를 소진하기만 하는 삶의 쳇바퀴를 돌리고 있음을 고백한다. 그런데, 함께 모여 소리내고, 움직여보고, 또한 움직임의 합을 맞추어보고, 합을 맞춘 움직임을 하나의 문장으로 정리해보는 행위들, 바로 이러한 행위들이 공동체 예술체험이다. 이러한 공동체 예술체험을 통해, 예술체험의 참여자들은 탈진이 아닌, 영감과 회복이 되는 시간이 만들어짐을 경험한다. 그리고 이러한 공동체 예술체험에서, 책읽기는 이 경험을 이끌어내는 정말 멋진 통로가 됨을 새삼, 새삼 인식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