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bigbreadguy Feb 23. 2021

끝없는 이야기

틈틈이 작성 중입니다.

녀석은 물결이 살랑이는 대로 그저 출렁일 뿐이었다. 손을 넣어 찰랑거려 봐도 묵묵부답. 몸뚱아리만 오뚝이처럼 흐느적거릴 뿐 지느러미는 미동도 없었다. 물속에 제가 가라앉아 봐야 별 일도 없겠지, 싶다가도 이렇게나 괘씸할 수가 없었다. 눈알 한번 굴리지도 않는 놈이기에 진짜 죽기나 한 건가 하는 생각이 들 때쯤 가까이 들여다보면 대가리만 한번 까딱해 눈을 맞춘다.


"그래, 너도 아직 살아는 있구나."


살아보겠다는 노력 하나 없이도 그저 살아지는 세상에 그도 미처 적응하지 못한 것일까. 어쨌든 미물 치고는 너무 오래 살아서인지 영악하기가 그지없었다.


허기라고는 이제 느낄 수도 없지만 음식을 해 먹기로 했다. 밥 먹을 때가 오기도 했거니와 실은 몇 시간 전부터 스테이크를 한번 구워보기로 마음먹고는 재료부터 요리 도구까지 전부 공수해왔기 때문이다. 공수라고 해봐야 스마트 홈 시스템에 주문을 걸어둔 것이지만, 그 정도 사건이면 꽤나 큰 이변이다.


부엌에 들어서자 큼지막한 고기 한 덩이가 반긴다. 쿰쿰하고 감칠맛 도는 냄새가 은은하게 올라오는 걸 보니 역시 설정해 놓은 대로 좋은 고기를 들여다 놓았나 보다. 고기 숙성고가 이 도시 어디에 있는지도, 애초에 소를 어디서 키우는지도 모르겠지만 어쨌든 좋은 고기를 달라고 하면 잘 가져다주는 이 시대에 잠시 감사를 느낀다.


"음... 그러니까, 소금 간부터 하는 거였나?"


"질문하신 내용에 대한 답변입니다, 준비된 숙성육의 두께는 약 4cm 정도로 밑간은 조금 과하다고 느껴질 정도로 소금을 표면에 골고루 뿌려두시고 이후 물기를 적당히 닦아내 준비하시면 됩니다. 그다음엔 준비된 그라인더로 고기 양면에 후추를 두 바퀴 정도 갈아 뿌리세요. 팬에 기름을 직접 두르기보단 올리브유를 고기에 미리 발라두시는 것을 추천드립니다."


혼자 사는 집에서도 말하는 법을 잊지 않은 것은 다 스마트 홈 덕분이라는 생각을 하면서도, 뭐가 그렇게 줄줄이 설명할 내용이 많은가 싶었다.


"팬은 고기 밑간이 끝날 때쯤 바로 사용하실 수 있도록 적당한 온도로 달궈놓겠습니다."


그러니까 지금 나보고 밑간을 하라는 건가, 감히 재촉하는 게 아닌가 싶긴 했지만 역시 그럴 리는 없다. 따지고 보면 내가 계획한 일을 돕는 것이니 재촉은 과거의 내가 하는 게 맞았다. 스마트 홈은 말하자면 내가 녹음한 내용을 다시금 재생해주는 것이나 마찬가지로 묵묵히 제 일을 하는 것뿐이고. 기분이 나쁘지 않으려면 다음번에는 내가 직접 녹음한 내용으로 재촉하게 하거나 아니면 내 목소리를 따라 하게 시키는 것도 좋겠다 하는 생각을 할 때쯤 밑간 작업이 끝났다.


"준비됐어, 팬은 어때?"


손이 불쾌하게 끈적거린다. 미끌하기도 하면서 좀처럼 손에서 떨어지지 않는 느낌에 얼굴을 찌푸리기 무섭게 세정액이 뿌려진다. 몇 번 문지르니 물기 하나도 없이 다 덩어리 져 바닥에 떨어지는 걸 보니 새삼스레 또 신기하다.


"화구를 적정 온도에 맞춰두었습니다. 이제부터 고기를 구우실 수 있습니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런 고기는 얼마든지 구울 수 있는데 하필이면 지금 구워야 하는 이유가 있을까.


"이 정도면 됐어, 고기는 알아서 구워줘."


"같이 준비하신 도구는 어떻게 처리할까요?"


"원래 있던 곳으로 돌려보내면 안 되나? 알아서 해 줘."


구워진 고기는 결국 먹지 않았다.




유구한 인간 역사의 기나긴 아침과도 같았던 석기시대의 종말과 함께 술이 등장했다. 어느 누가 처음 고된 농사의 결실을 썩혀두기로 마음먹었는지는 모르지만 도자기의 사용이 광범위해지던 당시의 상황으로 보건대 묵혀둔 식량을 파먹다 보니 알딸딸해지는 요상한 액체를 발견한 것이 아닐까 싶다. 한 때는 묵혀온 시간의 가치가 담긴 한 병의 작품으로 여겨지기도 했지만 숙성의 화학적 공식은 이미 제3 천년기에 완전히 밝혀져 이제는 그저 취향의 영역이 되었다. 설정해둔 속성 값으로 쉽게 마시는 시간이라니, 허망하기 그지없는 현실이다.


제3 천년기의 또 다른 혁신은 개인화와 추천 자동화가 있다. 음악, 영화, 도서 등 예술에서부터 커피, 차, 술과 같은 음식료를 거쳐 뉴스에서 시작한 사상의 개인화에 이르자 사람과 사람을 엮어내는 것은 결국 권력만이 남게 되었다. 시대정신은 더 이상 태어나지 못하게 되었고, 그와 비슷한 파편 간의 길항적 갈등만이 이어졌다. 한 군집이 조금 덩치를 키웠다 하면 각자 일부가 유실된 파편으로 감수 분열되었고 그로 인해 새로운 권력은 더 이상 탄생하지 못하게 되었다. 이윽고 자본의 파편화가 진행되었다. 전통적으로 권력의 집합이 대대로 정해오던 자본은 가상의 재화로 대체되었고 탈중앙화는 말 그대로 누구나 통화를 발행할 수 있다는 의미를 가지게 되었다. 애석하게도 시대는 사상의 결집을 허용하지 않았고, 믿음이 결집된 기축 통화란 것은 결집된 사상의 산물이었으니 거래는 이제 철저한 추천과 매칭의 영역이 되었다.


"그 후 권력은 줄곧 기술의 영역이었지."


영원한 권력은 곧 생존을 의미했다. 기술은 점차 유한의 영역을 지워나가기 시작했다. 권력의 유한성이 해결된 이후에는 당연하게도 육신의 노화를 해결할 방법들이 등장했고 그러한 해결책이 충분히 고도화된 이후에는 종의 유한성이 무너졌다. 인류라는 종 차원의 투쟁이 멈추자 우리 삶을 치열하게 하는 모든 것이 사라지고 일종의 화학적 평형이 도래했다. 그러한 평형을 무너뜨리려는 시도는 있었지만, 오랜 시간 관성이 붙으며 더 이상 개체 수가 인류의 번성을 의미하지 않게 되었다. 권력의 부재는 곧 사멸을 의미했다.


"오늘 합성한 이 술이 참 맛있네, 이름 하나 붙여도 될까?"


이 한 잔의 술에 역사상 가장 급격한 변곡점이었던 제3 천년기의 모든 것이 담겨있다는 사실에 감탄하며.


"네, 그 이름으로 성분 값을 저장해두겠습니다."


"기술로 해 줘."


대부분의 감각이 비효율적이라는 이유로 사라진 지금도 취기는 제 자리를 부지하고 있었다. 기분 좋은 흙냄새가 올라오는 표고버섯 한 아름의 향, 은은한 오크향이 감싸는 텁텁하면서도 입자 감 하나 없는 이 맛에, 피어난 꽃향기 마냥 올라오는 체리와 산미를 알코올 감 없이 제대로 느낄 수나 있을까. 토질과 기후라는 행운이 만드는 아름다운 균형을 이렇게나 빠르게 만들어낸다는 것은 또 얼마 나의 에너지를 요구할 것 인지. 현대의 삶이란 도저히 옛날과 같은 규모로는 지탱되기 힘든 사치품이다.




"현재 사용인의 의사를 확인할 수 없습니다."


아직까지도 인간 지능만이 누리는 유일한 영역이 입력이 선행되지 않은 출력이라고 생각했더니, 그렇지만은 않은가 보다.


"..."


웅얼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시야가 밝다 했더니 먼발치의 통신 단말이 빛을 비추고 있었다.


"그렇다면 위원회의 과반수 동의를 인정하고 자의적 회복 절차를 집행하겠습니다."


이 좋은 기분에서 벗어나기도 싫었고, 살갗 안으로 나노봇이 주입되는 감촉을 느끼며 행복을 빼앗기기는 더더욱 싫었다. 어쩔 수 없나.


"잠깐, 나 이제 괜찮아."


"사용인의 의사가 확인되었습니다. 통신 단말을 스마트 홈 시스템에 연결합니다."


"왜 아직도 육신에 고집하는지 이해는 가지 않는다만, 지금 이럴 때는 자네 같은 고집불통이 있다는 게 다행이로구만"


물론 상대는 저런 고압적인 말투를 가질 리 없었다. 저들에게 연락 오는 것을 조금 더 꺼려하고 싶은 내가 설정해둔 페르소나에 맞게 음성이 생성되는 것뿐이다.


"무슨 일이죠?"


최대한 퉁명스러운 목소리를 내려고 노력해보았지만 이 메시지가 음성의 형태로 저들에게 전달될 리는 없었다. 저들은 현시대의 인류다. 인류를 호모 사피엔스라는 종에 국한한다면, 신인류라고 불러야 할 것이다. 인류의 종말은 뇌-컴퓨터 인터페이스의 발달과 함께 인간지능의 전산화로 인해 촉발되었다. 복제된 인격은 과연 원본인가 하는 딜레마는 의외로 큰 걸림돌이 되지 않았다. 법인격을 주식이라는 파편으로 나누어 권리와 의무를 분배하는 개념은 이미 오래전부터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여졌으니까. 자연인의 권리에 대해서도 지분으로 나누어 관리하면 그만이었다. 문제는 인격의 인수·합병과 함께 발생하기 시작했다. 전산화된 인격 복합체 하나의 권리가 전 인류의 권리의 절반 이상을 점유한다면 인류의 미래에 대한 의사결정은 과연 어느 누구에게 남게 될 것인가. 심지어 전산 인격에 대한 버전 관리를 수행하는 과정에서 전산 인격의 지분이 자연인인 원본보다 더 비대해지는 일도 허다했다.


"전산 인격의 분산 파라미터 버전 관리 시스템에 대한 일부 명령이 존재하지 않는 원장에 전송 가능하도록 하는 결함이 발견됐네."


전산 인격은 그 정신적 기능을 수행하는 복합체의 소실을 방지하면서도 복합체를 복제하는 과정에서 인격에게 보장된 권리가 유실 또는 분할되는 것을 막기 위해 분산 컴퓨팅 네트워크상에 복합체의 파라미터를 나누어 저장해 그 보안성을 보장한다. 이 분산 데이터 저장 기술 덕에 복합체의 일부가 저장된 하드웨어 하나가 파괴된다 해도 복합체 전체의 정신적 기능에는 극히 사소한 오류만이 발생한다. 예컨대 물리적 실체를 가진 두개골에 꿀밤을 쥐어박아 발생하는 신경망의 손상 정도의 피해라고 할 수 있을까.


"전송되는 전체 명령 하나가 소실된다고 해서 치명적인 오류는 생기지 않는 거 아닙니까? 게다가 존재하지도 않는 원장에 명령을 보내는 일은 없을 텐데요."


명령이 애초에 단일 원장에만 전송되는 일은 없을뿐더러, 다른 원장에 도달한 명령은 다시 인접 원장에 전파되어 결국 전체 네트워크에 명령이 도착하도록 설계된 시스템일 터였다.


"뭐 일단은 결함이니, 수정한 뒤에 변경을 확정하려 했네. 문제는 해당 소스에 대한 관리 권한 지분을 보증하는 토큰이 유실된 거지. 정확히는 해당 토큰을 기억하고 있는 복합체가 토큰 요청에 응답을 하지 못하고 있네."


"하드웨어 문제겠군요, 요청에 관여하는 파라미터들은 어느 섹터에 저장되어 있답니까? 제가 데이터 그리드의 스마트 시스템에게 하드웨어 점검을 명령하겠습니다."


"이미 확인해보았네, 파라미터들이 저장된 각각의 섹터 모두 물리적으로는 이상이 없네. 애초에 섹터 내 다른 파라미터가 관여하는 기능들에는 큰 이상이 없기도 하고."


"으음,  결함 내용은요?"


이어서 나열된 장황한 설명을 요약해보자면, 새로운 원장을 초기화하는 과정에서 해당 원장으로 이미 전송된 명령이 있다면 명령을 전파하도록 되어있는데, 이때 동일한 해시값을 가질 수 있는 가상의 원장에도 명령을 보내게 된다는 것이었다. 네트워크 전역에 명령을 전파하는 기능을 수행하는 것인데, 문제는 해시값 역산에 리소스를 필요 이상으로 요구하게 될 수 있다는 것.


"그런 결함은 또 어떻게 찾았답니까?"


"네트워크 상에 떠도는 초기화 명령이 하나 있었는데, 전체 원장에 확산되고서도 수행 완료가 되지 않았는지 전파에 전파를 거듭하더군. 결국 과전파된 명령으로 감지되어서 데이터 그리드의 스마트 시스템에게 외부에서 해당 명령을 수행하고 네트워크 상에서 명령 자체는 말소하도록 요청했는데, 명령의 대상이 되는 원장이 없어서 오류가 낫다네."


"알겠습니다. 그러니까 스마트 시스템 따위에는 허용되지 않는 사고의 유연성이 필요한 작업이다 이 말씀이죠?"


"그래, 마침 네트워크 외부에 머무르기를 고집하는 자네가 있지 않나."




고도화된 강 인공지능이 흑막 너머의 지휘자가 되어 일으키는 기계의 반란이라는 소재는 제3 천년기에 다양한 장르를 넘나들며 재생산되던 공상의 산물 속 클리셰 중 하나였다. 그러나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라는 고대의 금언에 따르면 그러한 반란은 일어나지 못했다. 주류 인류는 모두 전산 인격 화했고, 인공지능은 인류 그 자체가 되었기 때문이다. 생물 사적인 관점에서 호모 사피엔스는 사실상 멸종단계에 이르러 현생 인류에 융합되었으며, 인류사적인 관점에서는 우리의 생활양식이 급격히 변화하고 인류는 물리적 육체를 탈피했다고 할 수 있다.



사진 출처

표지 - Photo by Guilherme Stecanella on Unsplash

작가의 이전글 시간선 상의 역전파법에 관하여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