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깨비’ 김은숙 작가와 질투 많은 남편 이야기
<여보, 여보도 공유처럼 파마해보는 게 어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얼굴이 공유가 아닌데.>
며칠 전 진지한 얼굴로 와이프가 말했다. 드라마 ‘도깨비’가 종영한지도 몇 년이 지난 것 같은데 아직까지 공유라는 배우에게서 헤어 나오지를 못한 것 같다. 아직까지 드라마 주제가를 흥얼거리기도 하고, 그가 TV 광고에 나올 때마다 입꼬리가 올라가는 걸 보면 좁은 내 속에서 질투가 스멀스멀 기어 나온다.
<공유가 잘생겼어? 난 잘 모르겠는데. 캐릭터 하나 잘 만나서 그렇지 뭐.>
부인에 대한 질투는 한 배우의 외모 부정에 다다른다.
<우리나라 드라마를 왜 봐? 백마 탄 왕자나 재벌 3세들이 보통 사람하고 왜 만나냐?>
나는 대한민국의 드라마를 보지 않는다. 어렸을 때는 좀 봤던 것 같은데 30대가 되면서는 거의 보지 않는다. 의식적으로 보지 않으려고 한다. 우리나라에서 인기 드라마가 된다는 것은 곧 백마 탄 왕자와 신데렐라의 사랑 이야기일 뿐이라고 깎아내리고는, 비현실적인 이야기가 허파에 바람만 집어넣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예전에 와이프가 끈질기게 같이 보자고 했던 ‘도깨비’도 결국 보지 않았다. 틈만 나면 한국 드라마는 문제가 많다, 그걸 볼 시간에 책이나 봐라 하며 잔소리를 해댄다. 이야기에 대체 공감할 부분이 있냐 하며 역정을 내기도 했다.
요즘 나는 코미디언 송은이와 작가 겸 감독 장항준 씨가 진행하는 ‘시네 마운틴’이라는 팟캐스트를 좋아한다. 영화 소개를 넘어 토크를 산으로 보내는 둘의 입담을 때로는 경외하면서 출퇴근길을 오간다. ‘시네 마운틴’에서 얼마 전 영화 ‘델마와 루이스’를 소개하던 날, 뜬금없이 장항준 감독은 자신의 지인 이야기를 한다.
“내가 아는 한 작가는 강원도 산골에서 태어났어요. 화전 같은 일을 하시는 부모님 밑에서 세 자매의 맞이로 태어났죠. 집이 너무 가난해서 밖에 비가 내리면 빗물이 천장에서 새서 밥상에 떨어지곤 했어요. 어느 날도 비가 엄청나게 왔고 세 자매는 쌀밥에 김치 몇 장으로 아침 식사를 하고 있었습니다. 밥을 먹다 막내 남자아이가 <학교 다녀올게요!> 하고 밖으로 뛰어나가는 거예요. 그러니까 또 남동생 하나가 같이 <저도 학교 다녀오겠습니다!> 하고 뛰어나가요. 정말 초조했답니다. 왜냐면 그 집에는 우산이 하나밖에 없었거든요.”
<헐. 같이 쓰고 가지. 그걸 자기 혼자 쓰고 가겠다고... 쯧쯧>
“밥을 꾸역꾸역 먹고 학교에 가려고 현관에 나왔는데 갑자기 펑펑 울었대요. 왜? 우산이 거기에 있었답니다. 하나밖에 없던 그 우산이 말이에요. 그 날 이후 작가의 인생 목표는 남동생들을 돌봐야 한다는 것이었어요. 학교를 다니면서 경리 일도 하고,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동생들 학비를 벌기 시작합니다. 그러다 우연히 글 쓰는 걸 좋아하니까 서울 예술 대학 문예 창작부에 응시를 했는데 이게 덜컥 합격이 돼버린 거예요. 며칠 밤낮을 고민 했죠. 아 내가 대학에, 그것도 서울로 가게 되면 동생들 뒷바라지는 어떡하나. 부모님은 또 어떡하나 하고. 그러다가 용기를 내서 부모님께 말씀을 드렸더니, 정말 다행히도 부모님께서 선뜻 서울로 가라고 말씀을 하십니다. <그래 가라. 너도 니 인생을 살아야지. 우리처럼 살면 안 돼.> 자, 바로 이 이야기의 주인공은...”
이쯤 되니 이야기 속의 주인공을 열렬히 응원하고 있었다. 그 사람이 누가 되었던지 간에 성공한 사람이길 바랐고, 동생들과 부모님들도 안녕하시길. 이야기는 이렇게 현실적이어야지!
“자, 이 이야기의 주인공이 바로 김은숙 작가입니다. 파리의 연인으로 시작해서 시크릿 가든, 상속자들, 태양의 후예, 도깨비 등등 엄청난 작품들을 만들었죠.”
<뭐? 김은숙 작가라고? 도깨비라고?>
머리가 살짝 띵했다. 내가 그토록 싫어해 마지않았던, 신데렐라 스토리를 양산하는 주범이라 생각했던 작가의 이야기에 흠뻑 빠져있었다.
아니 본인도 백마 탄 왕자님을 만나 성공하지 않았는데 왜?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본인의 노력으로 성공을 거머쥐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써야지 왜? 대체 왜 이런 현실적인 이야기 대신에 그런 드라마를 쓰는 거야?
“김은숙 작가가 너무 남자 주인공들이 비현실적이라는 지적을 많이 받았대요. 어느 인터뷰에서 이야기합니다.
<제가 남자 주인공을 그릴 때 떠올리는 것은 남동생들이에요. 제 드라마 속의 남자 주인공은 바로 제 남동생들 같은 인물이어야 합니다.>”
나는 그동안 드라마를 보지도 않고 비난만 했구나 싶어 마음이 편치 않았다. 드라마를 보며 열광하는 사람들을 이해하려 하지 않았고, 양산형 대한민국 드라마는 오히려 사라져야 하는 해악이라고까지 여겼다. 누군가를 질투하는 사람은 열등감이 숨겨져 있다고들 하는데, 내가 즐기지 못하는 것들에도 열등감을 질투로 드러내고 있었구나.
김은숙 작가의 이야기와 그가 만들어 낸 캐릭터들은 비현실적이지 않았다. 그 속에 작가의 철학이 담겨 있었다. 비가 쏟아지던 날 하나 남은 우산을 안 가져가기 위해서 밥을 먹다 말고 뛰쳐나갔던 남동생들. 그들이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면 했을 법한 이야기들을 쓴다. 동생들이라면 이런 식으로 말했겠지. 김은숙 작가는 이야기 속에서 동생들의 ‘따뜻함’을 보여주려고 했다고 생각한다. 인물들의 대사와 몸짓 하나하나에 ‘따뜻함’이 묻어있고, 그 온기로 사람들의 열광적인 반응이 생겨나는 것이 아닐까. 드라마와 대중의 반응을 애써 무시했던 내는 ‘따뜻함’이 결여되어 있던 것은 아닐까.
이다음 김은숙 작가의 이야기를 와이프가 좋아하면, 나도 같이 봐야겠다.
언젠가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는 날, 현관 앞에 놓아 둘 우산 하나를 마음속에 품을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