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진아, 세정, 이바다, HYNN (박혜원)
호우 : 술 취한 버스 안에서 제목과 가수를 매칭해서 들었을 때 너무나, 슬프게 들린 이 노래가 사랑을 말하고 있었다니. 뭔가 잘못됐어. 흐느끼면서 호소하던 권진아는 낮에 틀었던 똑같은 곡에서 새로운 설렘을 야기한다. 천천히 젖어가는 밀물처럼, 그녀의 목소리 끝에서 젖어가던 슬픔의 뒤에는 감격과도 같은 벅차오름이 있었다. 곡을 열며 툭툭 떨어지는 피아노 선율을 따라 점차 확신을 가진 감정을 뒤따르고, 이내 그 끝에선 다시 한번 꽃망울을 터트리며 설렘을 피워낸다. 특히, 감정의 완급을 진성과 가성의 몇 초로 조절하는 모습과 그녀 자신의 감정에 대한 확신이 곡을 특별하게 물들인다. 익숙한 구조건만, 쉽게 따라 할 수 없는 그녀의 보컬에 눈물샘이 그렁거린다.
안테나의 노래가 들려주는 감정의 결은 참 순수하다. EDM으로 무장한 음악 속에서 꽃 핀 정원이랄까. 유희열과 그곳의 아티스트는 무던했던 감정을 한 겹 한 겹 녹아내리게 하는 능력이 있다.
호우 : ‘꽃길만 걷게 해줄게요.’ 항상 무언가를 해준다던 그녀였다. 타인을 위해 항상 꽃을 피우고 있는 그녀가 긍정적이고, 씩씩하게 걸으며 피워낸 것들은 다 누군가를 위한 것들이다. 그렇기에, ‘필요’를 말하는 그녀의 모습이 조금 낯설어 보인다. 자신을 향한 마음이 만든 이번 앨범은 그래서 더 차분하고 진지하다.
타이틀곡 화분은 깨끗하고 정갈하다. 꾸밈보다 덜어내기를 택했다. 가벼운 피아노와 기타의 선율을 붙여 나긋하게 듣는 이를 품어준다. 선우정아가 작곡하고, 바버렛츠의 안신애의 협업으로 탄생한 노랫말도 제법 특이하지만, 본인의 역량으로 잘 담아내며 위로를 잘 담아내고 있다. 감정을 부풀려 터트리기 바쁘고, 갑작스럽게도 쾌청을 강요하는 노래가 남발하기에, 위로 하나만을 간소하게 담은 ‘화분’이 정감 가는 이유가 아닐까 싶다.
마냥 괜찮다며 토닥여주는 노래들보다 좋은 이유가 있을까. 아마 있다면 ‘그늘진 마음’이 전제되었기 때문이 아닐까. ‘무거워진 공기’와 ‘키가 작아진 하늘’과 같은 우울을 보듬고 품어주는 ‘오늘은 괜찮아’가 그 이유를 대변해 준다. 반사적인 말들이 아닌 공감을 바라듯, 세정의 노래도 그런 포근하고 따뜻한 이해를 말한다. 특히, 여린 가성으로 처리해 감성을 전달하고, 단단하고 견고하게 마지막 후렴을 소화해 나가듯이 그녀의 역량뿐만 아니라 충분한 공감을 느낄 수 있었다.
남은 앨범도 ‘세정’의 목소리를 앞세워 부드럽게 나아간다. 공감을 지나 찬란한 응원을 보내는 ‘SKYLINE’과 그루브한 ‘오리발’로 대중적이고 변화를 틀어 앨범의 다양성을 보여준다. 무엇보다 눈에 띄는 건 그녀가 아예 작사, 작곡에 참여해 감각적인 그녀의 면모가 드러난다는 것. 마지막으로 ‘꿈속에서 널’은 확실한 그녀의 가창을 볼 수 있었다.
단순히 보여주기 식의 앨범이라는 인상보다는 솔로 가수의 확실한 정체성을 엿볼 수 있는 앨범이 아닐까 싶다. 수수하게, 그리고 천천히 쌓아온 세정을 잘 녹여낸 작품이다. 남을 위해 꿋꿋이 가꿔내던 세정은 또 다른 꽃을 피워낼 씨앗을 품는 자신만의 화분을 키우고자 한다. 그럼에도 또 누군가는 그 화분을 보며 위로를 받겠지.
최크롬 : 첫 정규앨범 <THE OCEAN>에서 음악적 다양성을 뽐내던 이바다는 이젠 당연한 순서가 왔다는 듯 본인의 이야기, 진중함이라는 키워드를 꺼내든다. 결과적으로 ‘Diana’와 ‘Empty Room’은 각각의 스타일을 강조하기보단 하나의 주제의식 아래에서 움직인다. 첫 트랙 ‘Diana’는 자아가 느끼는 불안을 대화의 형태로 풀어나간다. 이렇게 내면의 목소리 ‘devil’과 이야기를 나누는 훅에서 갈등은 정점에 이른다. 여기서 리드미컬한 진행과 덤덤한 보컬 처리가 훅에 무게감을 더한다. 또한 매력적인 분위기를 조성해 주는 기타 리프 또한 자칫 심심할 뻔했던 곡의 방향을 분명하게 잡아준다. ‘Diana’가 타이틀곡 ‘Empty Room’에 비해 존재감이 전혀 뒤처지지 않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락의 성격이 더 강한 ‘Empty Room’은 마찬가지로 빈 방이라는 비유를 통해 불안정한 내면을 노래한다. ‘Diana’와는 다르게 감정의 고저와 사운드의 풍성함, 그로부터 비롯되는 몽환적인 분위기에 더 초점을 둔 모습이다. 이렇게 이바다 고유의 음색과 대중적인 매력을 확보함으로써 ‘Empty Room’은 R&B에 더 충실한 ‘Diana’와 구분된다. 두 개의 트랙은 비슷하면서도 또 다른 것이다.
다만 앨범의 주제의식이 반듯하게 전달이 되지 않는 건 분명하다. 가사에 비유가 많고 표현이 다소 추상적이기에 말하고자 하는 바가 곡의 분위기에 쉽게 묻혀버린다. 어쩌면 이바다의 두드러지는 보컬 스타일이 가사를 강조하기 어려운 환경을 제공하는 걸지도 모르겠다. 만약 이번 앨범의 목표에서 고유의 스토리텔링을 제공하는 것이 1순위였다면, 그 기획은 성공적이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단순히 “이런 바이브야”가 아닌, 설득력이 있거나 캐치한 디테일이 존재했다면 더 좋았을 것이다.
무민 : 이 앨범을 기점으로 사람들은 박혜원을 더 이상 '발라더'의 틀에 가둘 수 없지 않을까. 박혜원의 보컬은 이미 군더더기 없이 완성된 상태에서 대중들을 마주했지만, 시기를 거듭할수록 화려한 스킬과 고음에 휩싸여 주목받지 못했던 섬세한 감정선과 탄탄한 베이스가 가진 또 다른 파괴력이 리스너들의 마음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한순간 감탄하고 흘려보내는 반 쪽 짜리 감상이 아닌, 본인만의 무드를 통해 대중들과 몰입도 높은 접점을 만들어내기 시작한 것이다. 누군가 타이틀곡 '아무렇지 않게, 안녕'의 하이라이트를 물어본다면, 가냘프지만 꽉 찬 가성으로 분위기를 이끌어가는 1절 후렴을 들려주고 싶다. 이러한 섬세함과 탄탄함이 있기에 후반부에 폭발적으로 몰아치는 고음의 향연이 설득력을 가질 수 있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앨범 전곡에서 드러나는 박혜원의 가창을 면밀히 살펴보았을 때, 발라드 향을 기반으로 하고는 있지만 분명하게 느껴지는 '락'보컬의 파괴력이 틈틈이 고개를 내민다. 동시에 전작의 1번 트랙 '눈꽃'과 이번 앨범의 (공교롭게도) 1번 트랙인 '당신이 지나간 자리, 꽃'에서 보여주듯이, 탄탄한 기량을 동반한 어쿠스틱한 트랙에서의 자유분방한 완급조절은 에일리, 거미 등 수준급 중견 보컬리스트들의 그것을 연상시킨다.
아직까지는 단일 트랙/앨범의 완성도 만으로 충격을 주는 단계에는 이르지 못했다 하더라도, 우리는 지금 신예 보컬리스트가 원숙한 아티스트로 거듭나기 시작하는 가장 아름답고 빛나는 과도기를 지켜보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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