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사코>가 부르는 이름
<아사코>의 시작을 떠올려 본다. 모든 것이 생동하는 여름, 강가의 중학생들이 폭죽을 터뜨리는 동안 아사코는 한 작가의 사진전을 관람하고 있다. 쌍둥이가 손을 맞잡은 채 서 있는 사진 앞에서 그녀는 미묘한 표정을 짓는다. 꼭 닮아있는 두 아이를 바라보는 아사코의 올곧은 시선 뒤로 한 남자가 지나간다. 그때의 아사코는 미래의 일을 결코 알 수 없다. 한참의 시간이 지난 겨울, 아사코는 같은 사진을 다시 마주하게 된다. 같은 얼굴을 가진 새로운 남자를 만난 이후의 일이다.
그렇다면 같은 얼굴을 가진 두 사람을 다르게 규정짓는 것은 무엇인가. 결국 그것은 ‘이름’이다. 쌍둥이가 각자의 이름을 통해서 다른 사람으로 구분 지어지듯, 이름은 구별의 수단이 된다. 그러한 맥락에서 <아사코>의 호명은 정체성의 문제, 더 나아가 관계의 명명으로 이어진다. 바쿠가 아사코의 이름을 부르자 첫사랑은 터지는 불꽃과 함께 시작되고, 아사코가 료헤이의 이름을 묻는 순간부터 그는 아사코에게 마음이 이끌리고 만다. 그렇게 세 사람이 행하는 호명은 그들을 잇고, 또 가르는 장치가 된다.
영화의 영제는 <Asako Ⅰ&Ⅱ>다. 아사코가 바쿠와 료헤이, 같은 얼굴의 두 사람을 만나며 둘의 정체성을 구분 짓는 동안 아사코 역시 이전과 같은 아사코로 머무르지는 않는다. 바쿠와 함께하는 아사코, 그리고 료헤이와 함께하는 아사코는 분명 같지만 결코 같을 수 없는 사람이다. 아사코가 부르는 이름이 바뀌는 지점, 그녀의 세계가 흔들리는 지점에서 아사코는 Ⅰ과 Ⅱ로 새로이 명명된다.
아사코Ⅰ과 바쿠의 연애담은 티 없는 환상처럼 느껴진다. 사랑에 빠진 두 사람은 지나치게 낭만적이고, 바쿠는 과도하게 자유로우며 아사코는 그런 바쿠에게 대책 없이 빠져 있다. 바쿠가 말없이 사라지고 또 예상치 못한 순간에 다시 나타나는 것까지 어쩌면 그냥 꿈이 아닐까, 싶게 현실과 동떨어져 있다.
그런가 하면 아사코Ⅱ의 경우는 훨씬 안정적이다. 현실을 알고, 어른스러운 료헤이의 옆에서 아사코의 일상은 지극히 자연스럽다. 평범한 직장 생활을 하며 료헤이와 함께 고양이를 키우고, 주말에는 바닷가 마을로 함께 일손을 도우러 가는, 아주 보통의 평화로운 일상이다. 하지만 아사코Ⅱ는 늘 어느 정도의 불안감을 가지고 있다. 바쿠의 잔상 속에서 호명된 료헤이와 그를 부정할 수 없는 아사코Ⅱ는 그들 자체로 완전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영화는 결말부에 이르러 아사코Ⅰ과 Ⅱ를 같은 선상으로 올린다. 바쿠를 떠나 료헤이와 함께 했던, 그리고 다시 바쿠를 선택했다가 다시 료헤이에게 돌아온 아사코의 앞에는 빗물로 불어난 강이 펼쳐져 있다. 더 이상의 구분이 무의미해지고, 전부 뒤엉켜 버린 상황 앞에서 아사코는 드디어 Ⅰ로도, Ⅱ로도 명명할 수 없는 그저 '아사코'가 된다. 료헤이와 아사코는 서로를 보지 않고 입을 연다. “더러운 강이군.” “그래도 아름다워.”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이 명명하는 <아사코>의 세계는 그 강물의 흐름과 같다. 모든 것이 섞이고 빠져나간 자리에서도 강은 그저 흐른다, 그 무엇과도 다르게, 그저 아름답도록.
어떤 사건은 일어나버린 후에는 절대 그 전으로 다시 돌아갈 수 없다. 더러워진 강물에 몸을 실은 두 사람은 이제 불안하고 연약한 신뢰를 위태롭게 이어나갈 것이다. 하지만 나는 이 영화의 결말을, 두 사람의 엔딩을 응원하고 싶다. 두 사람은 바로 그 자리에서, 다시금 서로를 호명할 것이기 때문이다. 바쿠의 잔상을 지운 료헤이와 어쩌면 새로이 찾아올 아사코Ⅲ의 이야기는 어떤 모습일까. 두 사람의 강은 또 어떻게 흐르게 될까. 아사코는, 이제 어떤 이름을 부르게 될까. 확실한 것은 <아사코>가 더없이 분명한 목소리로 우리를 호명해 냈다는 사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