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버나움>의 시선, 아이가 지나온 자리
<가버나움>의 특별함은 이 영화가 아이를 대하는 태도에 있다. 아이가 자라나는 사회는 결코 아름답지 않다. 그렇다고 마냥 절망적이지만도 않다. 지극히 현실적인 세계를 배경으로 두고, 영화는 묵묵히 아이가 지나는 자리를 응시한다. 집요할 만큼 정직한 시선이다. 그래서 <가버나움>에는 어떠한 기적도 구원도 없다. 다만 한 아이를 원래 있어야 할 곳으로, 가려졌던 세계 속으로 편입시키는 순간이 있을 뿐이다.
‘자인’은 혼란스러운 세상 속에서 나이를 잃어버린 아이다. 레바논의 상황은 열악하다. 어른들은 무력하고, 가족은 가난하다. 아이들은 가짜 총을 들고 지저분한 거리를 헤집고 다니지만 질서를 바로 잡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자인의 부모는 열 명이 넘는 아이를 낳는 동안 자인을 방치한다. 출생 기록이 없는 자인은 어떻게 자라나든 숫자를 세어 줄 어른이 없다. 그래서 자인의 시간은 영원처럼 흘러간다. 어제 같은 오늘이, 오늘 같던 어제가 뒤엉켜 지나간다.
자인은 아무도 규정해주지 않는 자신의 존재를 스스로 증명하고자 한다. 그래서 그는 자주 어른의 역할을 대신하며 ‘보호자’가 된다. 동생 사하르를 매매혼에서 구해내기 위해 탈출을 계획하고, 라힐을 잃은 어린 요나스를 어떻게든 돌본다. 그는 자신과 같은 처지에 있는 아이들에 대한 연민이자 책임감으로 그들을 지키고 싶어 한다. 그렇게 해야만 자신을 지킬 수 있는 듯, 부단히 애를 쓴다.
하지만 자인의 꿈은 번번이 좌절되고 만다. 어린 사하르는 나이 많은 남자에게 팔려가 죽음을 맞이하고, 라힐이 떠난 자리에서 아이를 지켜낼 능력이 없는 자인은 요나스마저 떠나보낸다. 아이가 아이를 지키기에 세상은 너무 힘겹다. 더 이상 보호자가 아닌 자인은 홀로 남겨진다. 그리고 자인은 제 목소리를 찾아 나선다. 부모를 고소함으로써, 지워져 가는 제 존재를 찾고자 한다. 더 이상 저와 같은 아이들을 만들지 않기 위해서.
<가버나움>은 성장영화가 아니다. 많은 영화 속의 아이들이 자신의 존재 이유를 찾아 방황하며 성장하지만 자인에게는 더 이상 성장할 자리가 없다. 영화의 첫 장면에서 마주했던 자인의 전신을 기억한다. 프레임의 위아래를 가득 채우며 삐딱하게 선 자인에게는 더 자라날 공간이 없다. 이미 사는 게 벅찬 자인에게 영화는 성장을 강요하지 않는다. 그저 자인이 있어야 할 본래의 위치, 아이의 자리에 그를 데려다 놓는다.
영화의 마지막으로 가면 자인은 신분증 사진 촬영을 앞두고 있다. 오른쪽으로 조금 더, 왼쪽으로. 아니 너무 많이 갔어. 이어지는 말에 자인은 자신의 위치에서 방향을 다시 설명해 준다. 자신에게 오른쪽은 이 쪽이라고. 비로소 세계와의 균형을 맞춰가는 아이는 카메라와 시선을 마주한다. 그리고 자인은 미소 짓는다. 영화를 통틀어 처음 만나는 소년다운 웃음이다. 출생 기록이 없던 자인이, 잃어버렸던 세계로 편입되는 순간이다. 아이가 아이답기는 얼마나 어렵고, 또 아름다운가. 그렇게, 어른이 되어야만 했던 아이는 비로소 '아이'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