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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혜인 Feb 12. 2022

찬실이는 복도 많지 (2019)

좋아하는 것을 좋아한다고 말하기


찬실은 영화 프로듀서다. 정확히는 망한 프로듀서. 평생 영화를 할 줄 알았으나 인생은 뜻대로 흘러가는 법이 없다. 함께 작품하던 감독님은 죽고, 제작사 대표는 '영화는 감독만의 예술'이라며 찬실을 내치고, 주인집 할머니는 니가 하는 일이 뭔지도 제대로 말 못 하냐며 타박한다. 찬실은 마흔 살이고 연애보다 일에 집중하며 살아왔고 이제는 돈이 한 푼도 없어서 가사도우미를 한다. 이렇게 시작하는 영화는 찬실의 소소한 여정을 씩씩하게 따라나선다.


<찬실이는 복도 많지>는 존재감을 과시하기 위해 불필요한 기교를 부리지 않는다. 조금은 투박한 화면 안에서 인물의 개성이 빛난다. 찬실은 사랑스럽다. 맑다. 좋아하는 것을 좋아한다고 말하고, 슬픈 것을 숨기려 하지 않고, 자신이 실패했다는 사실을 인정하며 다시 일어선다. 많이 울고, 상처받는 시간의 연속이다. 그래도 찬실은 진짜 자신에 대해 깊이 고민한 끝에 제 나름의 답을 찾는다. "할머니가 되면 정말 하고 싶은 일이 없어지나요?" 찬실에게는 아직 하고 싶은 일이 너무나도 많다. 찬실은 이제 시나리오를 쓴다. 비로소, 자신의 영화를 찍기로 한다.


이런 찬실의 옆에는 소피, 영, 그리고 할머니 등의 든든한 조력자가 있지만 이 영화의 가장 큰 매력은 찬실이 창조해 낸 인물 '장국영'에 있다. 한겨울에 흰 나시에 팬티만 입고 홀연히 나타나는 이 유령은 너무 '웃기다'. 앞머리를 한 가닥만 내리고 3시에 매표소에서 저를 기다리는 여자를 만나러 간단다. 조금은 우스꽝스러운 모습이지만, 사실 장국영은 어린 찬실의 열망을 환기시키는 인물이다. 홍콩 영화를 보며 그렸던 우상, 라디오를 들으며 키웠던 꿈, 처음 영화를 하겠다고 다짐했던 순간. 자칫하면 지나치게 감성적으로 빠질 만한 때에도 이 캐릭터는 아코디언을 들고 나오며 유머를 잃지 않는다. 그리고 임무를 완수한 후에는 홀연히 사라지면서, 마침내 관객의 자리로 들어온다. 찬실의 영화를 마지막까지 지켜봐 줄 단 한 명의 자리로.


주인공 찬실이 그렇듯, 이 영화의 김초희 감독은 영화를 정말로 좋아하는 사람 같다. 진심으로 좋아하는 마음을 숨기지 않는 사람은 쉽게 무너지지 않는다. 관계도 꿈도 잘 되지는 않더라도, 잘 지낼 수는 있다는 낙관. 이 영화의 온기는 그 낙관에서 나온다. 상황이 어떻든 씩씩하게 살아나갈 사람들을 위해서. 모든 것이 희망적이지는 않더라도 자신의 길을 찾아가는 모두를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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