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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셜or패밀리 워커 May 10. 2023

친애하는 우리의 집들에게

6인가족 서울 전세 살이 유랑기

막내가 그렸던 예전 집 옥상에서의 즐거웠던 추억.


몇 년 전 책 모임에서 '친애하는 나의 집에게'라는 하재영의 에세이를 함께 읽고, 토론도 했다. 집에 대해선 할 이야기가 무지 많아서 언젠가는 내가 살아 온 집들에 대한 스토리를 정리해 보고 싶었다.


2010년~2014년 한 집에서 아이들 넷을 낳았었다. 그때는 아이들이 어렸기 때문에 좁아도 크게 문제 되지 않았었다. 2015년 1월, 아이들 넷을 데리고 이사를 강행했다. 큰 아이는 6살, 삼둥이는 두 돌도 되지 않았다. 남편 직장 때문에 지역도 옮겨야 하는 상황이었다. 이사 철도 아니었고, 우리가 가진 예산으로는 선택지가 거의 없었다. 오랫동안 공실이었던 아주 오래된 구옥으로 이사를 했다. 단독은 아니고 여러 가구가 한 마당을 가운데 두고 둘러서 살고 있는 진짜 오래된 집이었다. 집주인은 할머니였고, 큰아들 가족, 중국 유학생, 노부부가 한 대문 안에 세 들어 살았다. 그 동네는 재개발이 몇 년 동안 지지부진했던 곳이라 젊은 사람들이 살지 않는 곳이었다. 아직도 서울에 이런 곳이 있나 할 정도로 시간이 멈춰있는 듯했다. 갑자기 어린아이들이 4명이나 이사 와서 조용했던 동네가 시끌벅적해졌다. 아이들 보기 힘든 동네에 고만고만한 아가들이 돌아다니니 동네 어르신들이 신기해하셨다. 어떤 분은 손녀딸의 작아진 옷가지들도 가져다주시기도 했다. 정겨운 시골마을 같았다. 그런데 아이들이 자꾸 아프기 시작했다. 별의별 전염병을 달고 와 단체로 입원하는 날도 생겼다. 많이 아플 시기이기도 했지만 좁은 집에 환기도 잘 되지 않고 '헌집증후군'때문이었는지도 모르겠다. 1년 정도 살다가 도저히 안 되겠다 싶어 지인의 소개로 아주 넓은 상가건물 4층으로 부랴부랴 이사를 했다. 

 집주인 할머니는 한 때 잘 나갔던 집안의 안주인이었다. 아주 오래전에 그 집은 유명한 가든이었다. 할아버지는 돌아가신 지 오래된 것 같았다. 허리도 구부정하고 연세도 꽤 많은 어르신은 혼자 안채를 차지하셨다. 큰 아들 부부와 손주들도 같이 살았다. 큰아들도 한때 잘 나가던 사람이었지만 모든 재산을 탕진하고 어머님 집에 얹혀산다고 했다. 며느리는 시어머니와 말도 섞지 않고 심지어 밥도 같이 먹지 않았다. 직장에 다니는 손녀와 방에서 잘 나오지 않고 공부만 하고 있다는 손자는 새벽마다 부모님에게 원망 섞인 목소리로 소리를 지르며 싸웠다. 그 집 며느리는 어머님에 대한 원망 때문인지 세입자들에게 시비를 걸었다. 남편이 밤에 택시운전을 하고 들어와 낮에 자야 한다고 마당에서 놀고 있는 아이들에게 조용히 하라며 소리를 지르기도 했다. 그 집의 명의는 할머니의 또 다른 자녀들 2명의 공동명의로 되어있었다. 전세 계약을 할 때 그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어떤 사연인지 대충 감이 왔다. 


 새로 이사한 두 번째 집은 건물 한 층을 다 쓰는 것이니 집은 대궐같이 넓었다. 아래층에는 나염공장이 있었다. 아이들이 집에서 뛰어놀아도, 시끄럽게 해도 아무도 뭐라 하지 않았다. 게다가 넓은 옥상에서 자전거도 타고 여름에는 대형 수영장을 설치해 주어 물놀이도 실컷 했다. 그 집에서 4년을 살았다. 집은 넓고 층간소음으로 눈치안 봐도 되는 것 말고는 불편한 게 역시 많았다. 겨울에 실내온도가 15도를 넘은 적이 없다. 너무 추워서 실내에 가스난로를 틀어놓아야 살 수 있었다. 비가 오면 천정에 누수로 물이 뚝뚝 떨어지고, 아래층 나염공장의 독한 화학 약품 냄새가 집으로 들어왔다. 재개발이 곧 될 거라고 했다. 집이 너무 오래되어서 손 볼 곳도 많았지만 재개발이 될 집이니 건물주는 수리를 잘해 주지 않았다. 5월에 결국 보일러가 수명을 다했다. 온수가 나오지 않는데 버티고 살다가 도저히 불편해서 못 살 것 같아서 집주인에게 이사를 가겠다고 했다. 그리고 우리 마음에 드는 집을 드디어 찾아냈다. 건물주는 보증금을 빼주지 못한다고 했다. 재개발 보상금이 나오면 그때 준다고 했다. 우리는 갈 집의 가계약을 해 놓은 상태였다. 우여곡절 끝에 급하게 대출을 받아서 보증금을 받지 못한 상태로 이사를 강행해야만 했다. 여러 달 마음을 졸인 끝에 드디어 보증금을 받았다.

  아이들은 그 집에 대한 추억을 지금도 이야기한다. 그 집과 동네는 허물어지고 지금 아파트가 들어서려고 땅을 다지고 있다. 그 집에 이사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집 근처에 성범죄자가 살고 있다는 신상명세?를 우편으로 여러 편 받았다. 우리 집 건물은 도로변에 있지만 뒤쪽으로는 경사가 심하고 차도 들어갈 수 없는 맹지에 쪽방촌이었다. 아주 오래된 큰 교회가 중간에 자리를 차지하고 있고, 폐가처럼 허물어진 집들도 있어 을씨년스러워 밤에는 올라가지 못할 그런 동네였다. 우리가 이사한 날짜는 정확히 6월 초였다. 새로 이사한 집에 법원에서 서류들이 날아왔다. 재개발로 이주를 하지 않으면 법적인 조치를 취한다는 뭐 그런 내용이었다. 그 많던 원주민들은 다 어디로 뿔뿔이 흩어져 살고 있을까? 13년 이상을 살아야 임대아파트 거주가 가능하다고 했다. 재개발의 명과 암을 제대로 알게 해 준 집으로 기억된다. 


 아이들과 세 번째 이사한 현재 집은 큰 감나무가 있는 마당 딸린 단독주택이다. 아이들이 아직 어리기 때문에 다세대에 사는 것은 아무래도 층간소음 때문에 선택지에 올릴 수가 없었다. 그래서 단독주택을 찾아보았다. 반지하에는 두세 대가 살고, 우리 집은 주인집 같은 1층, 2층에는 주인세대가 사는 집이다. 실평수 25평이니 좁은 집은 아니다. 그리고 마당도 우리가 사용할 수 있고, 집 옆에 주차도 할 수 있다. 집 옆에는 큰 놀이터가 있고, 집에서 초등학교, 주민센터, 도서관 등이 반경 100미터 안 거리였다. 집 주변은 대단지 아파트가 있어서 웬만한 상권도 근거리에 있다. 아무것도 없었던 전 동네에 비하면 아이들 키우기는 좋은 환경이었다.

 이사 와서 아이들이 전에 살던 집보다는 좁아지고 아랫집 때문에 뛰지 못하게 하니 불만이 많았다. 그러나 집 옆에 놀이터도 있고, 코로나가 풀리며 학교에 다니니 어느 정도 그 부분은 해소가 되었다. 아이들이 학교에 다니며 친구들과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우리만 아파트에 살지 않는다고 했다. 우리가 아파트에 살 수 없는 이유는 층간소음 때문이라고 계속 말해 주었다. 그리고 마당에서 캠핑하는 기분으로 고기도 구워 먹을 수 있는 게 얼마나 좋은지 모른다며 오버하며 말했다. 이 집에서 산지 딱 만 3년이 되었다. 1년만 더 살면 또 이사를 가야 한다. 갑질하는 집주인이 나가라고 했다. 아이들이 많으니 우리는 어쩔 수 없이 을이 되었다. 집이 오래되어서 고칠 것이 생기면 우리가 이사 온 후로 자꾸 고장 난다고 난리를 친다. 


 우리같이 대식구가 살 수 있는 공공임대주택은 서울에서 찾아보기 어렵다. 행복주택, 공공임대주택은 1인가구, 청년들에게만 내어주는 것 같다. 아이들은 많이 낳으라고 하며 왜 제일 중요한 주택문제는 개선이 되지 않는 것인지... 내년에는 또 어디로 가야 할까? 고금리 때문에 월세와 같은 전세에 살고 있는 우리가 갈 집은 어디일까? 아이들은 이제 깨끗하고 따뜻한 새집이나 아파트에 살고 싶다고 한다. 큰 아이는 중학교에 다니고, 삼둥이도 고학년이 되어서 전학문제도 쉽지 않고, 고려해야 할 상황이 너무 많다. 집 값도 내리고 전세도 많이 내렸다는데 참 와닿지 않는 현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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