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를 알게 된 건 우연찮게도 전시기간이 일주일 연장된 시점에서였다. 마지막 열차에 헐레벌떡 올라탔음에도 그 시간을 소중히 하지 않고 갈까 말까 일정을 조율하다가, 결국 또 우연히 하루가 더 연장된 마지막 날에서야 예약을 완료했다. 분명 망설였던 그 시간들을 후회할걸 알면서도 발걸음을 내딛기 전의 나는 마냥 시간이 영원할 것처럼 나태하다.
예상한 것보다 거대한 크기의 작품을 실물로 접하거나, 혹은 예상한 것보다 작은 사이즈의 작품을 실물로 접했을 때, 가끔은 내 예상을 호기롭게 걷어찬 작품 앞에서 나만의 비밀스러운 희열을 느낀다. 역시 오길 잘했다며 내 발걸음을 칭찬한다. 이규태의 작품은 그러했다. 실제로 보지 않았다면 손바닥만한 사이즈에 담겨 있는 그만의 세계를 알 수 없었을 것이다. 맨눈으로 작업하기 어려웠을 그 세계를 들여다보기 위해 나는 더 안으로 빨려 들어가 동공을 작품 가까이에 가져다 댄다. 겉으로 드러나는 나른한 빛의 세계는 그 안으로 들어가 무수히 많은 선과 색으로 덧입혀진 또 다른 세계를 접하고 나서 그 괴리감과 맞닿았다. 저 안 깊숙한 곳에서 발견되는 또 다른 세계는 한 발짝 물러섰을 때 드러나는 나른한 빛의 세계만큼 따뜻하지 않았다. 빈틈없이 날카롭던 선의 이어짐은 한걸음 뒤로 물러났을 때와 다르다. 눈을 부릅뜨고 목을 앞으로 한껏 내빼어 보던 것과는 다른 것이었다. 그렇다면 작가의 세계는 빈틈없이 정교하게 채워진 날카로운 것일까, 한걸음 뒤로 물러났을 때 보인 따뜻하고도 나른한 것일까.
전시기간이 두 번이나 연장된 우연한 기회와 더불어 작가와 대면할 수 있었던 어제의 또 다른 기회는 봄날의 시작 지점에서 순간의 기억으로 남게 되었다. 사람들이 그의 작품을 좋아하는 이유는 한 발짝 물러섰을 때 어떤 방향에서든 드러나는 따뜻하고 나른한 빛이 존재하기 때문일 거라 생각한다. 보일 듯 보이지 않는 저 안의 날카로운 작은 선 하나를 긋기 위해 작가가 애썼을 시간을 생각하면 무언가 경이로우면서도 애처롭지만, 작가의 평화로운 마음 상태가 아니었다면 그 선 조차도 긋지 못했을 것이기에 어쩌면 저 안의 세계도, 겉으로 보이는 세계도 모두에게 따뜻한 것이라 생각한다.
모든 발걸음은 행하고 나서야 알게 된다. 망설였던 그 시간들이 참으로 하찮았다고. 순간의 기억을 위해 좀 더 용기 내어 발걸음을 내딛기로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