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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래현 Apr 22. 2024

병을 얻고 직장을 잃다

병마(病魔)와의 조우

 

사진 : Unsplash의 Adrian Swancar


 이 글의 제목부터 마음에 들지 않는다. 너무 안되지 않았는가, 병을 얻고 직장을 잃다니. 그러나 애석하게도 그 안된 주인공이 여기 있다. 정확한 병명은 '공황장애', 그 흔하디 흔한 질병에 사로잡혀 직장까지 잃은 사람이 바로 나다.


 때는 4년 전 무더운 여름날, 길고 긴 취업의 여정을 마치고 스물여덟의 나이에 드디어 첫 직장을 갖게 되었다. 나의 오랜 꿈이었던 매거진 에디터로 첫 입사를 하게 되다니. 감개가 무량한 순간이었다. 나를 맞이한 첫 회사는 건축과 인테리어를 다루는 잡지사로, 나름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는 곳이었다. 내가 어떻게 그곳에 최종 합격을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꽤나 극심한 경쟁을 뚫고 그 자리를 얻었다고 했다. 무척이나 자랑스러웠다. 그간 글쓰기 하나만을 전념해 온 자신이 대견하기까지 했다. 오래 묵혀온 해방의 북소리가 울려 퍼졌다. 좋아하고 잘할 수 있는 걸 직업으로 삼게 되다니, 그리고 돈을 벌 수 있다니! 이건 아무나 이룰 수 없는 꿈의 경지다,라고 당시엔 생각했다.

 나는 덩달아 직장 운도 좋았다. 나와 적어도 15~20살 나이 차이가 있는 이사님들은 내게 존칭(기자님, 이 기자)까지 써 주시며 나를 존중해 주셨고, 같은 부서인 편집부의 국장님과 선배들 모두 나무랄 데 없는 좋은 사람들이었다. 그 누구도 나를 괴롭히거나 악담을 퍼붓는 이가 없었고, 모두가 묵묵히 자기 일을 열심히 하기 바빴다. 우리는 때론 회의실에 모여 간식이나 과일을 먹으며 수다를 떨기도 했고, 잦진 않지만 즐거운 회식 자리를 갖기도 했다. 비록 작은 회사일지라도 이곳에 소속됨으로써 나는 큰 안정과 위로를 느끼고 있었다.

 신문방송학을 전공한 나로서는 건축과 인테리어에 아는 것이라곤 브랜드 몇 개가 전부였다. 그런 내가 이곳에 붙은 게 정말 의아하기도 했다. 왜 나였을까, 그 많은 사람들 중에서. 실제로 아는 게 없어서 처음 일할 때 난항을 겪기도 했다. 기본적인 건축 구조나 용어도 몰라 수시로 검색하기 바빴고, 인테리어 브랜드는 또 뭐가 그리도 많은지 해석하기가 여간 어려운 게 아니었다. 그래도 차츰 이 일에 익숙해지며 자리를 잡아가는 듯했다. 입사한 지 2개월 차가 되었을 때는 처음으로 섭외부터 인터뷰, 취재까지 해볼 기회가 생겼고, 완벽하진 않지만 나름 구색을 갖춘 기사도 쓰게 되었다. 아직 보잘것없는 신입이었지만, 나름 일을 잘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취재를 끝내고 집으로 돌아가는 열차 안에서 국장님이 해주신 말씀이 아직도 가슴속 깊이 남아있다.


"래현이 널 뽑은 건, 이번 연도에 내가 한 일 중 가장 잘한 일이야."


 국장님의 칭찬 이후로 나는 점점 더 욕심이 생겼다. 그저 구색만 갖춘 게 아닌, 정말 더욱 건축적이면서 예술적인 글을 쓰고 싶었다. 그놈의 예술이란 기준이 무엇인지 지금도 당최 모르겠다만. 그렇게 기사를 써 내려갈수록 난 계속 조바심이 났다. 그런 이유로 출근하는 날, 쉬는 날 할 것 없이 점점 기사에 또 글에 집착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 마음과는 달리 결과물은 영 마뜩잖았다. 신중하게 고른 어휘가, 문장이, 글이 전부 엉망으로 보였다. 그렇게 하루하루가 지나고 마감 기일이 다가와 겨우 기사를 완성했을 때, 내게 돌아온 건 오로지 후회와 자책뿐이었다.


조각하다, 결국 조각난 건 내 마음이었다


 3개월 차가 되었을 때, 미비하지만 조금씩 내 마음엔 병의 싹이 자라나고 있었다. 점점 글을 쓴다는 게 무서웠고, 완전하지 못한 내 글을 보는 사람들의 시선이 두려웠다. '이런 글을 쓰는 애가 무슨 에디터야' 하는 소리가 은연중에 내 귓가에 맴돌았다. 하지만, 매거진이 출간되기 위해서는 난 계속 기사를 써야 했고, 또 같은 후회와 자책을 반복해야 했다. 점점 그 골은 깊어져 갔고, 이윽고 못을 박기 시작했다. '나는 글을 쓰면 안 되는 애야'.

 그리고 드디어 사건이 터졌다. 서브 기사만 써 오던 내게 그 달의 메인인 특별기획 기사가 맡겨진 것이다. 물론, 혼자 하는 건 아니었고 선배 한 명이 이끌고 내가 보조(?)를 하는 역할이었다. 그 누구에게 말은 안 했지만, 이미 자신감은 바닥이 나 있던 터라 도무지 온전하게 해낼 용기가 나지 않았다. 그렇다고 모든 걸 이실직고하고 선배에게 전부 맡기자니 그것 또한 도의가 아니었다. 어쩔 수 없이 난 그 기사를 완성해야 했다. 선배와 나는 시간이 날 때마다 기사에 대한 회의를 했다. 하지만, 좀처럼 가닥이 잡히질 않았다. 시간은 점점 흐르는데 기사를 쓸 거리가 마땅치 않았다. 그러다 보니 당연히 자료 조사도 부실했고, 구성도 엉망이었다(적어도 내 기준에서는). 그 달의 중순인 기획회의가 다가왔고, 우리는 허울뿐인 보고를 하게 됐다. 기획자조차 마음에 들지 않는데, 총책임자는 어떻겠는가. 좀체 화를 안 내던 국장님이 선배와 내게 크게 한소리를 더했다. 순식간에 회의실 분위기는 초토화되었고, 나는 터지려는 눈물을 애써 참았다. 도대체 뭐가 어디서부터 어떻게 잘못된 것일까. 글도 못 쓰는데 기획도, 취재도 제대로 못하는 내가 진정 기자라고 할 수 있는가.


 그 일이 있은 후, 출근길이었다. 나는 여느 때와 다름없이 지하철을 타고 가고 있었다. 같은 시간대, 같은 사람들, 같은 풍경. 내 마음과는 달리 그 어느 것도 변하지 않은 온전한 하루의 한 장면이었다. 그것에 꽤나 복잡한 심경을 느끼며 난 미세하지만 심장이 뛰는 소리를 듣게 되었다. 쿵쿵- 쿵쿵쿵- 파동이 퍼지듯 그 소리는 더욱 기괴하게 또 우렁차게 내면에서 증폭해 왔다. 점점 커지는 진동을 느낀 나는 백지를 덮은 듯 머릿속이 온통 새하얗게 물들었다. 철컹철컹- 흔들리는 열차 속에서 점점 중심을 잡기가 어려웠다. 온몸에 서늘한 땀줄기가 느껴짐과 동시에 눈앞이 까맣게 흐려졌다.

 겨우 정신을 차렸을 때, 난 열차에서 내리고 있었다. 다행히 기절 같은 건 하지 않았다. 대신 몸에 힘이 다 빠져 도저히 걸을 기운이 나지 않았다. 난 몸이 축 처진 좀비처럼 걷고 또 걸어 겨우 에스컬레이터 난간을 잡고 연신 가쁜 숨을 들이쉬었다. 그런 나와 다르게 무심한 에스컬레이터는 천천히 출구로 나를 인도하고 있었다.

 그로부터 나는 종종 이 기이한 현상을 겪기 시작했다. 출근길부터 사무실, 집까지. 장소에 구애받지 않고 그것은 나를 점점 잠식해 왔다. 울지 않는 날이 없었으며, 심하면 몸을 사시나무 떨듯 흔들어 댔다. 그 과정을 지켜보던 엄마의 제안에 결국 급하게 신경정신과에 가게 되었다. 병원에서 나온 진단은 우울증과 불안 그리고 공황장애. 그렇게 나는 병마와의 줄다리기에서 손을 놓아버리고 말았고, 패배자로서 그 뒷감당을 치르게 되었다.

 처방받은 약을 먹어도 좀처럼 차도가 보이지 않았다. 사무실에서 기절 직전까지 가기를 여러 번 반복한 뒤에야 비로소 깨달았다. 난 버틸 수 없다는 것을. 결국 좋은 사람들과 직장을 뒤로하고 난 회사에 퇴사 의지를 밝혔다. 이유는 정확하게 하기 위해 그간 있었던 일들을 전부 털어놓았다. 어떻게든 나를 잡고 싶어 했던 국장님은 재택근무같이 내가 편해질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해 주겠다는 제안을 하셨다. 하지만, 난 한사코 거절할 수밖에 없었다. 지금이 아니면 정말 죽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국장님이 이전에 내게 하셨던 말씀이 내 심장, 아니 그보다 더 깊숙한 곳을 마구 찔렀다. '이번 연도에 가장 잘한 일', 국장님의 그 일을 내가 모두 망쳐버렸다. 그 죄송함에, 난 나가는 날까지 고개를 제대로 들 수 없었다.


 그로부터 4년이 지났다. 지금은 어떻게 지내냐고? 여전히 매일 약을 먹고 있다. 현재진행형이란 소리다. 물론 그때만큼 심각한 상태는 아니다. 복용 횟수도, 약의 개수도 줄었다. 어느 정도 일상생활 하는 데 지장이 없을 정도로 회복했다. 가끔씩 공황장애를 겪긴 하지만, 그 빈도수는 확연히 줄어든 게 느껴진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 4년 동안 평범하게 보낸 것만은 아니었다. 병을 얻은 뒤로 그간 나의 사회 경력은 처참히 무너졌다. 번번이 직장을 잃고 얻고를 반복했다(공황장애가 이유의 전부는 아니었지만). 어쨌든 그때를 계기로 인생이 무너지는 경험을 여러 차례 겪으며 그나마 평온해진 지금에 이르렀다. 지난날을 생각하면 아찔하기도 하지만 문득 궁금할 때가 있다. 지금껏 어떻게 살아있는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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