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석을 맞아 돌아본 가족
추석을 맞아 오랜만에 향한 고향집, 안방을 누비는 거대한 생명체를 보며 감탄을 금치 못했다. 처음 만났을 때 검은 옷에 흰 장갑을 끼고 빼빼 말랐던 냥이는 어느새 곰 한 마리가 되어 어슬렁거리고 있었다. 체중계에 올라선 그는 9킬로를 살짝 못 미치는 육중한 덩치를 자랑했다. 갈비뼈는 만져지지 않았고 축 늘어진 뱃살은 빨랫대에 널어놓은 겨울 이불처럼 출렁이고 있었다.
듣기로 냥이와 우리 가족의 만남은 아빠의 병원에서 돌아오는 길에 시작되었다고 한다. 집에서 차로 한 시간 거리인 병원부터 몰래 무임승차한 승객이 바로 녀석이었다. 이게 가능한 일인가 싶지만, 집에 도착하고부터 밤새 차에서 고양이 울음소리가 들렸다. 자동차 보닛을 열어보니 수염이 살짝 타고 얼굴에 그을음이 묻은 억울한 표정의 고양이가 애절한 눈빛으로 누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날부터 녀석은 냥이라 불리며 늦둥이인 내 자리를 대신해 응석받이가 되었다.
정이 많은 우리 엄마는 일평생 가족들의 밥을 챙겼다. 그 관성이 어디가랴, 이제는 새로운 막내의 밥을 챙긴다. 밥그릇 앞에서 울어재끼는 냥이를 보면 사료나 간식을 준다. 먹는 게 사는 낙일 텐데, 울어대는 모습을 보면 마음이 약해지신단다.
무뚝뚝한 우리 아빠는 일평생 가족의 생계를 책임졌다. 본인은 건더기도 별로 없는 국물에 밥을 말아 드시면서도 자식들의 밥상엔 소시지를 올려주셨다. 이제는 몸이 편찮으셔 일은 그만두셨지만, 냥이의 밥그릇에는 여전히 관대하다. 간드러지는 목소리로 애교를 부리는 녀석에게 오늘도 아빠는 지고 만다.
그렇게 이 사람 저 사람을 거치니 냥이의 몸은 불어나지 않을 수 없었다. 부모님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너무 비만이라고, 이제 적지 않은 나이로 들어서는 만큼 녀석의 건강을 챙겨야 한다며 잔소리를 늘어놓는다. 하지만 나는 안다. 아무리 말해도 부모님의 마음은 야옹 한 마디에 무너져 내릴 것을.
우리 부모님에게 자식은 항상 이런 존재였다. 숲을 보아야 한다는 걸 알면서도 마음이 약해져 눈앞의 나무에 시선이 머문다. 스트레스받을까 걱정된다며 양치 한 번 시키지 못한 녀석의 치아에 매달린 싯누런 치석은 부모님의 사랑이 모여 만들어졌다. 마치 내 어금니의 반짝이는 금니처럼 말이다. 사랑의 방향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구태여 반복하지는 않았다. 내 인생의 두 배를 넘게 살아온 부모님의 삶을 바꾸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결론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내 역할은 부모님의 사랑이 후에 후회가 되지 않게 냥이의 건강을 케어해 주는 일이다. 우리 가족의 톱니바퀴가 원활하게 돌기 위해서 꼭 필요한 윤활유 역할은 어느새 내 몫이 되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