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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까칠한말티즈 Mar 31. 2024

예산시장

 어릴 적 우리 집 3분 거리에는 5일장이 섰다. 장이 설 때마다 나는 엄마손을 잡고 과일을 사러 따라나섰다. 어린 나를 귀여워해주는 아주머니의 미소가 좋았고, 내가 좋아하는 귤을 몇 개 얹어 주시는 그 마음이 좋았기 때문이다. 가끔은 솜사탕을 하나 들고 얼굴에 잔뜩 묻혀가며 먹었던 기억도, 붕어빵의 꼬리만 먹고 몸통은 아빠에게 넘겼던 기억도 너무 생생하기만 한데, 벌써 20년이 지난 과거가 되었다.


 착각이겠지만 어린 시절의 시간은 보다 천천히 흘렀던 것 같다. 바쁘게 달려가는 나의 일상이 잠시 쉬어갔으면 하는 마음일까, 최근 들어 시간이 천천히 흐르는 듯한 느낌을 받는 게 좋다. 그래서 어린 시절의 향수가 느껴지는 장소를 찾으면 오래 머물고픈 마음이 든다. 그리고 최근 점심을 먹으러 들른 예산 시장에서 그 시절의 향수를 물씬 느낄 수 있었다.


 평일임에도 예산 시장은 수많은 여행객으로 북적였다. 막걸리를 양손 가득 들고 어디론가 향하는 아저씨들의 완연한 미소에 이끌려 따라간 곳에는 중앙 광장이 나를 반겼다. 손을 맞잡고 반대 손에 짐을 나누어 든 젊은 커플의 알콩달콩한 모습에 슬쩍 뒤섞여 나도 휴가 즐기는 양 잠시나마 상상의 나래를 펼쳐보았다. 여유로운 일상을 보내는 사람들을 보고 있으니 나의 시간도 천천히 흘러가는 것 같아 마음이 편안하면서도 부러움에 인적이 드문 식당을 찾기로 했다.


 그렇게 석쇠 불고기 식당으로 들어섰다. 식당 안에 1인석이 마련되어 있어서 편하게 식사를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나는 석쇠불고기와 계란찜 세트를 주문했는데 이럴 수가, 공깃밥을 팔지 않는다는 것이다! 알고 보니 공깃밥을 살 수 있는 상회가 따로 있어 상권의 상생을 위한 시스템 같았다. 대신 상회에서 공깃밥을 사서 식당 안에서 먹을 수 있도록 배려하는 것이다.

 이처럼 예산시장은 식사를 완성하려면 퀘스트를 깨는 것처럼 이곳저곳 돌아다녀야 하는 신선한 시스템을 갖추고 있었다. 가령 고기를 구워 먹기 위해서는 불판 빌려주는 집에서 불판을 빌리고, 정육점에서 고기를 산 후, 술은 따로 상회에서 구매해야 한다. 언뜻 보기엔 동선이 길어져 번거로워 보일 수 있다. 하지만 예스러운 분위기와 모던한 분위기가 융화되어 시선을 사로잡는 장소가 많아 구경하는 재미와 식사를 완성하는 성취감이 색다른 매력으로 다가왔다. 게다가 시장하면 떠오르는 저렴한 가격과 푸짐한 음식에 인심 역시 충분히 느낄 수 있었으니, 그 매력에 빠지지 않을 수 없었다.


 요즘에는 활성화된 시장도 적어졌고, 그 모습도 많이 변했다. 강산이 두 번 바뀔 만큼의 세월이 흘렀으니,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시장도 상인들도 수 차례의 풍파를 겪으며 살아남기 위한 변화를 거쳤을 것이다. 예산시장도 마찬가지였다. 어린 시절 내가 가던 시장의 모습과는 많이 달랐고 백종원 선생님이 만든 술과 레시피를 바탕으로 신선한 시장을 만들어냈다. 하지만 내가 사랑한 어릴 적 시장 특유의 분위기는 여전히 건재했다. 사람 냄새가 물씬 풍기는 정겨운 분위기. 한 시간 남짓 내가 걸었던 길에는 분명 어린아이의 발자국이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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