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생애 첫 한달살기 #13
싱가포르 국립 도서관의 다른 열람실들과 전시실도 구경하고 싶었다.
하지만 우리 집 남자 둘과 약속한 시간이 가까워져 약속 장소로 향할 수밖에 없었다. 건물 밖으로 나오니 날이 더 흐려지는 게 곧 비가 올 것만 같았다. 약속장소인 머라이언 파크까지 택시를 타야 할지 걸을지 고민을 하다 그냥 걷기로 했다. 1.5킬로미터 정도 되는 거리니 멀지는 않았다. 어차피 비가 와도 금방 지나가니 '건물 처마에서 피하면 된다.'라고 생각하며 걸었는데 빗줄기는 생각보다 굵었고 굵은 빗줄기를 맞는 동안 우산이 되어줄 만한 처마가 있는 건물은 없었다. 그렇다고 곧 그칠 비에 우산을 살 생각도 없었다. 이후 말레이시아에서도 비가 잠깐이라도 꽤 왔었는데 우산을 사지는 않았다. 제주에서 살다 보니 우산을 챙기는 게 괜한 일이다 싶을 때가 많다. 챙겨 나간 들 작은 비든 큰 비든 바람 때문에 사선으로 비가 오는 제주에서 우산은 제 역할을 못하고 뒤집히는 일이 허다하다. 어차피 맞을 거라면 맘 편히 맞아버리자! 이런 마인드가 장착되어 있는지 제주의 사선비가 아닌데도 우산이 참 거추장스러웠다. 머리가 젖는 건 말리면 그만인데 운동화가 젖으면 낭패니 물웅덩이를 밟지 않게 조심하며 잰걸음으로 목적지를 향해갔다.
에스플러네이드에 도착할 때 즈음 비가 멈추었다.
두리안 모양을 하고 있는 에스플러네이드 건물 앞 주빌리 브리지를 건너면 만남의 장소인 머라이언 파크에 도착한다. 주빌리 브리지에서는 싱가포르의 랜드마크들이 한눈에 들어온다. 마리나만 앞으로 싱가포르 플라이어와 아트사이언스 뮤지엄 그리고 마리나 베이 샌즈까지 꼭 엽서에 나오는 풍경 같았다. 같은 게 아니라 분명 엽서도 있을 것이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시선이 향하는 각도가 달라져 몇 번이고 멈춰 서서 보게 된다. 다리 거의 끝에 다다르니 물을 뿜어내는 머라이언 동상이 가까이 보였다. 싱가포르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그림이다.
머라이언 파크 스타벅스에 앉아 있는 둘,
언제 어디 있거나 내 눈에 정말 잘 띄는 두 남자다. 내가 국립 도서관을 둘러보고 있는 동안 남편과 아들은 대관람차인 싱가포르 플라이어를 타고 왔다. 대관람차는 어땠냐고 물으니 비가 와서 운치는 있었지만 흐려서 멀리까지는 잘 보이지 않아 아쉬웠다고 한다. 함께 탄 말레이시아 할머니께서 아이들을 좋아하시는지 머리 긴 아들을 딸이냐고 물으며 사진을 찍자고 하셨다고. 아들과 함께 사진을 찍은 히잡을 두르고 선글라스를 쓰신 귀여운 할머니의 모습에 다음날 갈 말레이시아가 조금은 더 가깝게 느껴졌다. 각자의 여행이야기를 주고받으며 에어컨 빵빵한 스타벅스에서 따뜻한 커피를 마셨다. 더운 나라에 와서 아이스 음료를 많이 마실 줄 알았는데 에어컨 바람 때문인지 따뜻한 음료를 더 찾게 된다.
스타벅스에서 나와 셋이 함께
머라이언 동상이 있는 곳으로 갔다.
싱가포르에 온 인증샷을 찍어야 하니까. 머라이언 동상 가까이엔 정말 사람이 많았다. 다들 사진을 찍느라 정신이 없다. 우리도 근처에 서서 머라이언이 뿜어 내는 물을 받아먹는 사진을 찍기 위해 각도를 잘 맞춰 입을 벌려 보았다. 찍는 사람도 웃고 찍히는 사람도 웃고 그걸 보는 주변 사람들도 웃고. 이게 뭐라고 다들 즐겁다. 찍어 놓은 사진과 영상을 보면 더 즐겁다. 물이 코로 들어갔다 입으로 들어갔다 윗니에 튕겼다 턱에 부딪혔다 은근히 각도 맞추기 어려운 사진들 덕분에 셋이 정말 많이 웃었다. 이 설정샷은 찍는 동안에도 다 찍고 나서도 많이 웃으라고 찍는 사진임에 틀림없다. 인증샷이기도 하지만 이 여행에서 가장 많이 웃은 추억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