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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위 Oct 31. 2024

'사전연명의료의향서'를 작성했다

죽음을 준비하는 나날들

엄마, 정말 결심한 거야?

응, 결심했어.

정말로 원해?

그럼 오늘 쓸까?

응, 그러자.


 어제는 대학 병원에서 하루 종일 진료를 보는 날이었다. 검사와 진료, 진료와 진료 사이에 총 4시간이란 대기 시간이 생겼다. 기다리던 중 그간 엄마와 여러 번 이야기를 나눈 적 있는 '사전연명의료의향서'를 작성하기로 했다. 엄마는 많이 아프게 된 이후로 자주 유언처럼 내게 말했다.


 "심폐소생술 하지 말고 인공호흡기 착용하지 말아라. 그렇게 해 봤자 다시 살아나는 것도 아니고 고통스럽게 죽고 싶지는 않다."


 나는 엄마의 말을 들으면서 여러 번 고민했다. 아무리 그렇다 해도 정말로 치료를 거부하고 죽음을 맞는다는 게 진심일까? 너무 힘드니까 그냥 한 번 해보는 소리는 아닐까? 이렇게 타인의 진심은 아무리 가족이라 해도 완벽히 알 수가 없기에 섣불리 확신할 수가 없다. 5년 전, 나는 비슷한 갈등을 하다 잘못된 선택을 하고 말았었다. 그 대가로 아버지는 2개월간 중환자실에서 연명의료만 받다가 돌아가셨다. 그때만 해도 나는 연명의료의 개념조차 제대로 알지 못했다. 지금도 사지가 묶인 채 온갖 기계를 주렁주렁 매달고 고통스러워하셨던 아버지의 모습을 생각하면 눈물이 난다. 아버지의 죽음 이후로 연명의료는 환자 본인에게도 가족들에게도 못할 짓이라는 생각을 늘 했었다.


  하지만 막상 엄마에게 닥칠 일이라고 생각하니 마음의 결정이 또다시 쉽지가 않았다. 그래서 차일피일 미루기만 해온 것이었다. 어제처럼 긴 시간을 병원에 머물지 않았다면 나는 또 잠시 생각만 하다가 그냥 덮어두고 말았을 거였다. 엄마가 의사 선생님께 의향을 말씀드렸더니 병원 내의 윤리위원회에서 상담사가 우리를 찾아왔다. 엄마에게 '연명의료'란 무엇이고 '사전연명의료의향서'를 작성하는 무슨 의미인지를 간단히 설명한 후 사인을 받아갔다. 엄마는 담담히, 그러나 단호하게 엄마의 이름 석 자를 서명란에 적었다. 역시 담담히, 그러나 슬프게 엄마의 사인을 바라보았다. 참으로 쉽고도 간단한 일이었다.  


 요즘은 건강한 분들도 '사전연명의료의향서'에 사인을 해두는 경우가 많다. 누구나 인간으로서의 존엄을 지킨 채로 생을 마감하고 싶기 때문이다. 시부모님께서는 진작에 두 분이 함께 가서 '사전연명의료의향서'를 작성해 두었다고 한다. 어쩌면 죽음을 준비 중이거나 죽음에 임박했을 때보다 건강할 때 작성해 두는 게 낫겠다는 생각도 든다. 막연한 미래에 다가올 죽음에 대한 결정은 현재의 마음을 크게 뒤흔들거나 실의에 빠지게 하진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감성보단 이성으로 판단할 수 있을 때 나의 죽음을 미리미리 준비해 두는 게 낫지 않을까?


 이러한 대비 없이 갑작스럽게 죽음에 임박하게 되었을 경우, 가족의 의지로 연명의료를 중단해야 하는 일도 생긴다. 그럴 때 가족들이 느끼는 고통은 엄청나게 커질 수밖에 없다. 아버지도 결국엔 나와 엄마가 연명의료를 중단한다는 서류에 직접 사인을 하고 나서야 온몸에 달아 놓았던 생명 연장 기계들을 떼어낼 수 있었다. 하지만 그때 나는 내 손으로 아버지의 목숨을 앗아가는 듯한 고통을 느꼈다. 더이상 회생이 불가하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이전에, 아직은 붙어 있는 목숨을 끊어 놓는다는 부담감과 죄책감이 너무나도 컸기 때문이다. 그래서 결심했다.  '사전연명의료의향서'는 반드시 내 손으로 직접 써두겠다고. 가족에게 이런 고통의 짐을 절대로 물려주지는 않겠다고.


 상담사는 여러 번 강조했다. 연명의료 중단은 임종과정에 있는 환자에게 치료의 효과 없이 생명만 연장하는 의학적 시술을 유보하거나 중단하는 것이지, 회생 가능성이 있다면 의료진은 그 모든 치료를 주저 없이 시행할 거라고 말이다. 우리가 연명의료 중단에 대해 부담감이나 거부감이 있는 이유는, 마치 생명을 강제로 중단시키는 듯한 공포를 느끼기 때문일 것이다. 내가 아버지의 연명의료를 중단하면서 느꼈던 고통도 역시 마찬가지 맥락이었다. 하지만 연명의료 중단은 절대로 안락사나 조력사가 아니다. 병원에서는 환자를 살리기 위해 끝까지 고군분투할 것이고 도저히 회생이 불가능할 때에만 치료 행위를 중단할 것이다. 그런 믿음이 있다면 서류에 사인하는 게 그다지 부담스러운 일만도 아니다.


 엄마와 나는 담담히 '사전연명의료의향서'를 작성했고 정해진 진료를 받은 후 귀가했다. 평상시와 아무것도 달라진 건 없었다. 여전히 엄마에게 주어진 생명은 하늘만이 아는 것이다. 병원 검사 결과 특별히 악화된 것이 없음에도 엄마는 자신의 여생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느끼고 있다. 그 또한 어쩔 도리가 없다. 나는 묵묵히 엄마의 곁을 보살피며 한 달일지 일 년일지 아니면 십 년일지 모르는 남은 생을 함께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돌아가시는 그날, 엄마의 뜻대로 아무런 고통 없이 편히 가실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 도와줄 것이다. 아버지가 모르핀에 취해서라도 고통 없이 편안히 웃으면서 돌아가실 수 있게 해 드렸듯이....


출처. 무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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