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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일피디 Mar 16. 2022

벌면 뭐하니?

예능PD의 통장


이번 주도 겨우 털었다.


 드디어 토요일 저녁. 이번 회차도 방송사고 없이 제시간에 무사히 온에어됐다. 해방이다. 아니 퇴근이다. 수요일에 출근해 4일 만에 집으로 돌아가는 길. 다시 생각해보니 해방이 맞는듯하다. 그렇다고 기뻐할 힘은 하나도 없지만 말이다. 녹초가 된 몸으로 무언가 해 먹기도 귀찮아 뭘 시켜 먹을까 고민하던 중. ‘아니 근데 나 돈이 있나. 돈 언제 들어왔더라.’


주급으로 페이를 받다 보니 입금되는 날짜가 아주 뒤죽박죽이다. 10일, 3일, 24일…. 잠깐 까먹고 있으면 내일당이 선물처럼 짠하고 통장에 들어와 있곤 하다. 계좌를 눌러보니. 어라. 생각보다 돈이 많았다. 화요일에 돈이 들어왔었네. 지난 나흘 동안 휴대폰 입금 알림 하나 확인할 시간 없이 일만 했나 보다. 속상하네! 정말. 계좌에 돈 찍힌 걸 확인하니 고민할 필요도 없었다. 편집하느라 고생한 이 손을 또 요리하느라 고생시킬 수 없지.


 오늘은 떡볶이다. 이러니 시발비용만 늘어난다. 아니 뭐 어때? 나 지금 4일 만에 돈 처음 쓰는 건데. 배달의 민족에 들어가 주문 내역을 살펴보니 2주 전 토요일에도 떡볶이를 시켜먹었다. 손가락을 더 힘들게 할 필요가 없었다. 그대로 장바구니에 담기. 그리고 결제하려는데

'어 잠깐. 소시지랑 주먹밥, 계란찜 추가 된건가?'  

보란듯이 그대로 찍혀있었다. 2주 전의 나도 오늘이랑 같은 기분이었나보다. 그대로 결제한다. 그런데 떡볶이 세트로는 뭔가 성에 안찬다.

‘통장에 묵혀두다 죽을 거니? 왜 돈을 벌었는데 그거 밖에 못 쓰니?’

쓰려고 버는 건데. 오늘 한 번 써보자.


 피곤하기도 하고 버스를 기다릴 힘도 없어서 카카오택시를 부르려던 찰나. 앞에 멈춰서는 버스 한 대. 고개를 들어보니 집 가는 버스다. 급할 때는 오지도 않더니 택시 타려니까 바로 오는 것 좀 보게. 세상이 내가 돈을 쓰도록 가만두지를 않는다. 열심히 번 돈 막 쓰지 말라고 그러나. 카카오택시 부르던 손을 멈추고 주머니에서 카드 지갑을 꺼낸다. 그리고 버스에 몸을 싣는다. 돈 쓰는 것도 마음처럼 쉽지가 않다.


빈털털이가 될까 걱정된 세상이 내게 호의를 베푸는 걸까? 흥. 그래도 싫다. 세상아 나는 막 쓰라고 돈 버는 거거든요. 내가 지금 돈을 아끼고 싶어서 내 의지대로 살고 있는 게 아니라고요. 버스를 내리자마자 올리브영으로 향했다. 기필코 돈을 쓰리라. 뭘 사면 좋을까 립스틱이며 아이섀도며 온갖 색조 화장품 코너를 누볐지만, 현타가 세게 왔다. 이걸 사서 어디 가서 대체 바를 거니. 회사 갈 때 화장도 안 하고 가면서. 아이 섀도우를 살까 말까 한참을 고민하고 있었는데 따르릉 전화가 울린다.


“배달 왔는데요”

아 맞다 나 떡볶이 시켰지.

“문 앞에 놔두고 가주세요. 금방 갑니다~”

또 못 썼다. 돈. 정말 세상이 내가 돈을 펑펑 쓰도록 가만두지를 않는다.



 일하면서 내가 내게 줄 수 있는 사치는 딱 23,000원 떡볶이까지다.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돈을 번다는 건 참 멋진 일인 줄 알았다. 멋진 일이지. 그런데 딱 거기까지밖에 생각을 못 했을까. 돈을 벌어서 무얼 할 텐가. 그때그때 시발비용으로 쓰자고 멋진 일을 꿈꾸고 계획한 것은 아니었을 터. 무얼 위해 돈을 버는가. 돈과 시간은 반비례한다던데. 돈이 많으면 시간이 없고, 돈이 없으면 시간이 많고. 딱 내 꼴이다. 돈을 벌면 뭐 하니. 쓸 시간이 없는데. 안 되겠다. 돈을 쓰기 위해서라도 내 시간을 찾아 나서야겠다. 돈이 너무 많다. 쓸 시간이 없다. 그러니 퇴사해야겠다.

p.s 누가 보면 한 10억은 있는 줄 알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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