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일피디 Mar 16. 2022

있으면 뭐하니?

예능PD의 팀


우리 팀에 저 사자 선배. 머리가 점점 부스스해지다가 사자가 되겠다. 사자와의 악연을 이야기하겠다. 사자 갈기처럼 부스스하니 그렇게 부르도록 하겠다. 성격이 사자처럼 으르렁거리는 거도 아니고 그냥 온전히 머리 때문이다.


내가 가편집한 부분이 방송상으로는 다음 주로 미뤄진다 하여 사자 선배 편집의 일정 부분을 받아 편집하게 됐다. 나한테 넘어온 편집 분량에 CG가 필요해 나는 핀터레스트와 유튜브 등을 보며 레퍼런스를 찾고 유달리 심혈을 기울여 CG의뢰서 작성을 끝마쳤다. 그때 사자에게서 카톡이 왔다.

_그 CG 내가 마무리할게요


이 카톡의 의미가 뭘까 한참을 생각했다. 내가 다 구상해 작업까지 다 끝마쳤는데 그걸 알면서 본인이 마무리하겠다니. 이건 뭐 그냥 내 아이디어 홀랑 채가서 네가 한 것처럼 하겠다는 거잖아!!! 나보고 CG 의뢰해달라고 해서 실컷 레퍼런스 찾고 어떻게 작업할지 내가 다 구상했는데 본인이 마무리해서 맡긴다니. 무슨 말도 안 되는. 그냥 내 아이디어를 홀라당 채가서 자기가 한 것처럼 하겠다는 심보 아니냐고. 심지어 의뢰서도 다 썼는데 이거를 자기 이름으로 맡기겠다는 건가. 내가 무슨 섀도우 가수도 아니고. 그래도 선배니 꾹 참고 카톡에 답장했다.

_그냥 제가 하던거니까 마저 할게요. 선배님 바쁘시잖아요.


그런데 내 카톡이 채 끝나기도 전에 사자는 내 방으로 와 내 CG 의뢰서를 가져갔다. 어안이 벙벙했다. 내가 싫다는 데도 내 방까지 와서 내가 작성한 의뢰서를 가져간다고? 재주는 곰이 부리고 돈은 왕서방이 받는다고. 너 나보다 월급도 더 받잖아. 하지만 내가 무슨 힘이 있나. 까라면 까야지. 나는 너무 화가 나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그대로 퇴근해버렸다.


그 이후로도 사자는 나를 묘하게 배제하기 시작했다. 재미있고 쉽게 편집할 수 있는 분량은 모두 자신이 가져가고 손 많이 가고 어려운 부분들 편집 분량을 나에게 주는 게 아닌가. 이건 회차가 거듭될수록 심해졌고, 나를 테스트하는 것도 아니고 가끔은 되지도 않는 피드백을 하는데 그때마다 그의 무능력이 보였다.


“CG 색깔 이상한 것 같아요 선배”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지연씨 생각은 어때요”

하. 그걸 왜 나한테 물어볼까. 선배님이 선배인데 선배 생각이 맞겠죠.

“이 부분 어떻게 정리하면 좋을까요 선배님”

“어……. 잠시만요……. 어떻게 하면 좋지…….”

“다른 선배한테 물어볼게요. “

“아니 내가… 정리할 수 있는데……그럼 내가 무능력해보이잖아요.”


‘너 무능력한 거 맞잖아’ 라고까지는 차마 말 못 하고.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고 미운털에는 미운털로 응하고 네가 사자인지 내가 사자인지 한번 보자. 그렇게 사자 선배와의 악연은 시작됐고 지금도 기 싸움 아닌 기 싸움을 펼치며 현재 진행 중이다. 그 순간순간마다 절대 사자처럼 늙지 않으리라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다짐한다. 후배보고 커피 사라고 하는 선배는 봤어도, 자기보다 일찍 퇴근하는 후배에게 쿠사리 먹이는 선배는 봤어도 이렇게 무능력하고, 선후배 가리지 않고 여우짓 해대는 선배는 처음이다. 정말. 진짜 내 반면교사가 되어주어 한 편으로는 또 고맙기도 하다. 아니 근데 잠깐만. 그러면서도 뜨끔하다. 지연아 근데 너 퇴사하고 싶다며. 왜 이곳에서 미래를 꿈꾸는 거야? 왜 다짐을 하는 거야. 자리를 뜨며 생각했다.

작가의 이전글 쉬면 뭐하니?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