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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아 Mar 14. 2024

친구라는 이름에 다 담기지 않는 너에게

너와 사랑을 주고받는 일은 어쩜 이렇게 쉬울까? 모든 게 어렵고 모호하기만 한 삶에서 단순하게 믿을 수 있는 것 한가지가 너와의 사랑일 거야.

 

올가을에 춤을 추다 울었어. 무언가가 사르르 녹아내려서 눈물로 흘러내렸는데, 그게 무엇인지 바라보니 내가 사랑받을 수 없을 것 같다는 두려움이더라. 어떤 큰 사건도 없이, 예상치 못한 순간에 갑작스레 그 생각에서 한 걸음 해방되었어. 나는 제 삶에 나를 들이고 싶다는 남자가 없어서 평생 괴로워했잖아. 아빠부터 그런 건 부담된다고 나를 내친 것만 같았으니까. 그러니 앞으로도 나를 매일 감내하겠노라고 선택할 수 있는 사람 같은 건 가질 수 없을 것만 같았어. 버려진 느낌을 어딘가 묻고 매일을 살아냈지.

 

그런데 우습게도, 그 생각으로 괴로워한 시간 동안 늘 나는 너를 가지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어. 단지 너는 여자였고 우리가 애인이란 이름표로 묶여있지 않았기 때문에 몰랐었나봐. 뜨거운 내 감정이 너를 매번 지치게 했는데도, 너는 내 곁에 있기를 한 번도 포기한 적이 없었어. 오히려 징글맞게 서로를 괴롭힌 그 시간을 지나오고서 너는 나에게 나 덕분에 ‘우울증’이라는 걸 깊게 이해할 수 있었다고 말했지. 너는 전혀 느껴본 적 없는 감각이었지만, 포기하지 않고 내 이야기를 듣고, 마음에 품어보고, 이리저리 굴려도 보면서 이해하려 온갖 애를 썼잖아. 그렇게 넌 닿을 수 없는 우리의 거리를 천천히, 그러나 확실히 좁혀나갔어.

 

그래서 울 수 있었어. 그래서 사랑을 믿을 수 있었어. 너라는 사람 없이는 건너올 수 없는 시간이었을지도 몰라. 지금의 나는 스스로가 다른 사람을 품을 수 있는 비옥한 땅이라고 느끼고 있어. 누군가를 내게 초대해서 사랑을 주고받을 수 있고, 이별할 때 충분히 애도할 수 있거든. 지금 내 마음에 머무는 사람들은 참 편하고 좋겠지. 그런데 내 마음이 무엇도 살아남기 힘든 황무지였을 때,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 뿌리를 내리고 또 내린 건 오로지 너야. 네가 그 시기에 누군가에게 조언을 구했다면, 나와 절교하라고 하는 사람도 한 명쯤은 있지 않았을까? 다행히 너는 남들에게 그런 걸 묻는 사람은 아니었고, 나와 함께하기를 주저한 적이 한 번도 없었던 것 같아.

 

우리는 과연 서로를 향한 마음을 충분히 가늠해 볼 수 있을까? 어디가 바닥인지 보이지 않는 우물과 같은 사랑을 말이야.

 

요즘 네가 많이 지쳐있어서 내 이야기를 들어주고, 위로해 주고 싶은데 그럴 수 없어서 난처했잖아. 그때 나는 너의 그런 마음을 모르고, 그냥 네가 좀 귀찮은가보다 하고 흘려 넘겼었지. 그 이야기를 꺼냈을 때, 너는 망설임 없이 ‘단언컨대 귀찮아서 너의 이야기를 허투루 들은 적은 한 번도 없어.’라고 대답했어.

 

또 내가 내 이야기를 듣기 버거워하는 너를 붙들고 도와달라 했을 때 말이야. 너는 내가 입을 떼자마자 눈물을 터트렸지. 우는 너를 보니 나도 눈물이 났어. 왜 우냐고 물었더니 ‘네가 너무 힘든데 들어줄 수 없었어서 너무 미안하다’고 했어. 나는 내 슬픔이 원치 않게 널 괴롭히는 게 참 미안했어. 우리는 서로 미안하다고 말하면서 껴안고 엉엉 울었지. 그 꼴이 청승맞아서 울다가 웃기도 했고 말이야. 그날이 네가 우는 걸 처음으로 본 날이었다니. 나를 너무 사랑해서 내 앞에서 눈물을 보인 나의 친구. 내 얼굴에서 슬픔이 일렁거릴 때 그 파도가 바로 너의 얼굴로 넘실거리는 것을 보았어. 우리는 어떻게 그렇게까지 이어져 있을 수 있는 건지.

 

그리고 네가 최근에 처음으로 힘든 일을 내게 나눈 적이 있었잖아. 큰 사랑이 너를 통과하고 떠나버려서 슬퍼할 때, 두서없이 이야기를 꺼내고 술에 잔뜩 취해 나를 귀찮게 굴 때 내가 얼마나 뿌듯했는지 넌 모를 거야. 괜찮지 않은 너를 만나고 챙겨줄 수 있는 게 나에겐 그저 기쁨이었어. 네가 그 경험을 통해 기대는 것도 사랑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고 말할 때는 제법 우쭐할 정도로 뿌듯하기도 했었고. 연인을 제외하고 마음을 열어볼 수 있었던 유일한 사람이 나라는 게 말이야. 네가 알지 모르겠지만, 나는 네가 필요하면 언제나 몇 번이고 네 푸념을 들을 거야. 매번 기쁜 마음으로. 난 그 무엇보다 너의 비빌 언덕이 될 수 있기를 바라고 있어.

 

너는 연락처에 나를 ‘남친보다 채용이’로 저장한 지 오래고, 우리가 같이 살고 난 후로 나는 너를 종종 와이프라고 부르고 있지. 닭살 돋는 농담을 싫어하는 너도 왜인지 반박하는 일은 없고 말이야. 장난으로 너에게 우리가 이성 친구였다면 한 번쯤 불장난 했을 거라는 내 말에 넌 아니라고 했어. 우리는 어려움을 겪었을지라도 결혼까지 성공했을 것 같대. 나도 곰곰이 생각해 보니 정말 그럴 것 같더라.

 

그니까 한 번쯤 우리는 결혼했을 것 같아. 전생이나 평행우주나 뭐 어딘가에서 말이야. 말도 안 되는 거 아는데, 어떤 삶에선 분명 제대로 백년해로하지 않았을까? 너와 평생을 함께했던 삶은 믿기지 않을 만큼 포근했겠지. 그 삶을 잘 건너와서, 기복이 많은 나를 걱정한 네가 이번 생에는 친구로 내 곁에 있어 주는 게 아닐지 생각을 해.

 

의심하지 않아도 되는 사랑을 내게 줘서 고마워. 너는 나의 발 디딜 땅이야. 부디 서로가 곁을 내어주는 시간이 네게도 따듯하길 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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