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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부리 Sep 09. 2023

집을 짓기로 마음먹었다.

집에 관한 기록_2023.09.08.

오래된 형광등 하나에 의지한 분식집의 밤은 어둡고 조용했다. 펄펄 끓던 기름솥과 찜기가 내일을 위해 고요히 잠든 시간, 문을 걸어 잠그기 직전에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 아주머니 한 분이 들어오셨다. 아주머니 뒤에는 커다란 그림자처럼 보이는 형체가 붙어 있었는데, 그 형체가 까까머리 열이라는 사실을 나는 금세 알아차릴 수 있었다


"우리 아들 에 멍이 있어 물으니 이 집 딸한테 맞고 왔다네요. 대체 가정교육을 어떻게 시키시기에 이런 일이 다 있나요?"


아주머니는 가볍게 눈인사를 하나 싶더니 차분하면서도 까랑까랑한 목소리로 가정교육 운운하며 엄마를 몰아세웠다. 영문도 모른 채 어퍼컷을 얻어맞은 엄마는 적잖이 당황한 듯 보였지만 그대로 당하고만 있을 사람이 아니었다.


"이유가 있었겠죠. 부리 이리 와 봐라."

"네."


나는 겁을 잔뜩 먹고 엄마 앞으로 갔다.

"너 왜 그랬냐?"

"이가 나 보고 다리 위에 산다고 거지라고 놀려서 그랬어요."


매서운 눈빛으로 나를 쏘아보던 엄마는 가게 안이 쩌렁쩌렁 울릴 만큼 큰 소리로 말했다.


"그래. 알았다. 앞으로도 너한테 그런 말 하거든 똑 같이 하그라."


엄마는 나를 보며 말했지만 나는 말의 주인이 따로 있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네? 지금 뭐라고 하셨나요?"

"거지라고 놀림받거든 때려주라 했습니더."

"참 나. 원 어이가 없어서... 어떻게 친구를 때리라고 가르칩니까?"

"사는 처지가 못 하다고 거지라 놀리는 건 친구가 아니니 때리라고 한 겁니더. 친구를 때리면 안 된다는 교육은 열이 어머니 나가시면 따로 하겠습니더."


아주머니는 결국 아무런 소득 없이 가게를 나서야 했. 아주머니의 낯빛은 들어오실 때처럼 붉었지만  묘하게 달랐다. 머리가 제법 굵어지고 내 행동에 스스로 책임질 나이가 돼서야 그 미묘한 차이를  수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나를 연민 혹은 놀림의 대상으로 만들었던 그 집에 대한 기억이 잊히는 것은 아니었다. 


교각 위에 한쪽 몸뚱이를 기댄 채 비스듬히 서 있는 가건물, 아무렇게나 바른 회벽 위로 낡은 슬레이트 지붕이 긴 처마를 만들어 내던 곳, 가게에 딸린 방 한 칸이 전부인 곳, 나는 그곳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한여름에도 늦은 밤 가게 문을 닫고 나서야 가게 한쪽 모퉁이에서 땀에 전 몸을 씻을 수 있었고, 연탄불을 확인하느라 기나긴 겨울밤을 짧게 끊어 보내야 했다. 철이 바뀔 때마다 강가 풀숲에 사는 벌레들이 수시로 찾아들었고 천장 위에 사는 생쥐 식구들이 일으키는 심각한 층간 소음에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다.


엄마가 부지런히 일하고 온 식구가 허리띠를 졸라 멘 덕에 초등학교를 졸업하기 전, 작은 빌라로 이사를 했고 주거환경도 꽤 나아졌지만 집에 대한 기억은 그 옛날 가건물 안에 박제되었다. 출가를 하고 가정경제를 독립적으로 운영하게 되면서 기억 속 그 집에서 최대한 멀리 떨어지기 위해 부단히 애를 썼다. 하지만 이혼 후, 온갖 짐들에 지배당한 친정집 방 안에 누워 닳아빠진 문턱, 누렇게 빛바랜 벽지를 보고 있노라면 내 삶이 점점 그 옛날의 가건물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것 같았다. 열심히 쉬지 않고 달려왔건만 결국 내 자리는 여기인가 하는 생각에 힘이 빠지고 내가 잘못 살아온 탓에 새끼들까지 못 할 고생을 시키고 있다는 생각에 괴로웠다.


분가를 하면 간단하게 해결될 문제지만 분가가 간단하지 않은 게 문제였다. 엄마는 지금 사는 이 시골 마을을 떠나지 않겠다는 확고한 신념을 유지한 채, 마음속에서 본인과 아이들을 운명공동체로 엮어 버렸기에 나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친정집의 문턱과 함께 낡아갈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어떤 선택도 내리지 못하고 시간만 보내던 중에 그 이 나타났다. 딸아이가 다니는 학교에서 도보 3분 거리, 중학교와 면사무소까지는 도보 8분 거리, 가까이 농협과 우체국이 있으며 상수도와 도시가스가 들어오는 곳. 엄마를 홀로 남겨두지 않으면서 주거환경을 개선할 여지가 있는 곳. 이 조건만으로 충분했기에 나는 가진 돈을 탈탈 털어 그 집을 샀다. 괴상한 모양의 집터에 자리한, 지은 지 반백년이 훨씬 넘은 집을 허물고 다시 짓는데 또 돈이 필요할 것을 알았지만 지니고 있는 것만으로도 희망이 될 것 같았다.


실제로 그 집을 산 이후 얼마간 희망회로를 쉴 새 없이 돌렸다. 부동산 시장이 다시 활기를 띄어 시내에 사놓은 아파트 값이 오르면 그걸 판 돈으로 집을 지을 수 있지 않을까? 로또라도 당첨되면 집을 지을 수 있지 않을까? 현재 마이너스 30프로가 넘는 그 회사의 주식이 플러스 30프로까지 뛰면 집을 지을 수 있지 않을까? 이직에 성공하면 퇴직금을 보태 집을 지을 수 있지 않을까?


하지만 희망회로를 아무리 돌려도 부동산 시장은 갈수록 침체되고, 주식은 솟아오를 기미가 전혀 없었다. 그러다 나를 더 이상 기다리게 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나고 말았다. 초등학교 3학년인 딸아이가 성조숙증 진단을 받은 것이다. 성조숙증을 앓는 아이들이 많다는 소리를 들었지만 몸무게 23kg, 키 130cm로 또래보다 여리고 작은 딸아이에게는 해당되지 않는 일이라 여겨 왔었다. 그런데 어느 날 딸아이의 왼쪽 가슴에 종기처럼 아주 조그마한 덩어리가 솟아 오른 걸 보았 혹시나 하는 마음에 성장클리닉을 찾았다가 우리 딸도 예외가 아님을 알게  것이다. 아이가 성조숙증 진단을 받은 날, 나는 아이가 조금 더 튼튼하고 건강한 몸으로 2차 성징을 맞이했으면 하는 바람에 성급하리만치 빠르게 치료를 결정했다. 그리고 그동안 세차게 돌려온 희망회로를 스스로 끊어버렸다. 부동산과 주식시장의 변화보다 딸아이의 몸에서 일어나고 있는 변화의 속도가 더 빠르다는 것을 알게 된 이상 지체할 시간이 없었다. 곧 사춘기가 될 딸과 아들을 언제까지고 친정집 방 한 칸에 몰아넣고  수는 노릇이었다.


나는 빚을 내서라도 집을 짓기로 했다.

그리고 아이들이 잠든 시간 혼자 책상 앞에 앉아 우리 집을 그렸다. 1층에는 나와 엄마가 같이 쓸 방을, 2층에는 딸과 아들을 위한 방을 각 한 칸씩 넣고 구조도만 그려보았을 뿐인데  집의 계단을 오르내리는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엄마의 걱정처럼 세상 살이 다 겪은 아저씨들도 힘들다는 집 짓기를 여자 혼자 시작한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내게 있어 집을 짓는다는 것은 가건물 위에 위태롭게 쌓아 올린 상처 투성이 마음을 허물고 단단한 마음의 집을 세우는 일이다. 더해서 우리 아이들에게 어떤 시련에도 흔들리지 않는 마음의 기반을 쌓아나갈 수 있도록 돕는 일이기도 하다. 그래서 단순히 집을 짓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짓는다는 생각, 허물어져가는 정신을 바로 세운다는 마음으로 어렵고도 긴 여정을 시작하려 한다. 


부리야 힘을 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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