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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부리 Nov 28. 2023

일렁이다

'연인' 앓이

내게도 일렁이는 마음이 있었나 보다. 결혼과 함께 말라 버렸다가 이혼과 함께 가루가 되어 날아간 그 쓸데없는 마음이 아직 남아 있었나 보다.


4주에 한 번 간격으로 받아야 하는 똥이의 조숙증 치료와 2주에 한 번씩 타야 하는 빵이의 ADHD약, 3주에 한 번씩 가는 상담치료까지 정해진 일정만으로도 결코 단조롭지 않은 삶이다. 여기에 전혀 팔릴 기미조차 하지 않는 아파트, 천정부지로 솟아버린 건축비, 여전히 마이너스 상태인 주식까지 걱정거리도 한 둘이 아니다. 그런데 '나'란 개체는 이 상황에 무슨 대단한 성취를 맛보겠다는 것인지 컴활 1급 시험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사실 처음에는 이렇게 오랜 기간 동안 휴직이라는 것을 해 본 적이 없기에 복직 후 ESC 버튼도 못 찾는 일을 방지하고자 컴퓨터 학원에 다녀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직업병 때문인지 기왕 다니는 학원, 컴퓨터활용능력 1급 자격증 하나는 건져야 될 것 같았다. 그렇게 무작정 컴퓨터활용능력 1급 실기 대비반에 등록하고 개강일을 기다리는데 컴퓨터학원에서 연락이 왔다.


"안녕하세요? ○○컴퓨터학원입니다. 온라인으로 1급 실기반 등록을 하셨는데 1급 필기는 합격을 하셨을까요?"

"아니요. 1급 실기 공부를 하면 필기 이해가 잘 된다고 들어서 실기 학원 다니면서 필기를 준비하려고요."

"아. 네. 맞아요. 그럼 2급은 있으신가요?"

"아니요. 20년 전에 딴 워드프로세서 1급 있습니다."

"워드랑 컴활 1급은 수준이 완전히 다릅니다. 40대 수강생분들은 컴활 1급 수업 들으시다 모두 중도 포기하고 나가셨어요. 중도포기하는 훈련생이 있으면 저희 기관에 마이너스가 돼서요. 2급이 없으시다면 2급 종합반 수업을 먼저 들으시고 2급을 취득하신 다음에 1급을 준비하시는 것도 좋을 것 같아요."

"아니요. 기왕 하는 것 1급으로 따보고 싶습니다. 포기하지 않고 열심히 하겠습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아. 네. 그러면 개강일에 뵙겠습니다."


내게는 사서 고생하는 재주 말고도 이렇게 가끔 다른 사람 말문을 틀어막는 재주도 있어서 대화는 오래 이어지지 않았다.


개강일 대학가에 위치한 학원에는 취업 필수 아이템이라는 컴퓨터활용능력 1급 자격증을 따기 위해 모여든 20대 초반 젊은 친구들로 가득했다. 희망을 장작 삼아 활활 타오르는 그들의 눈빛을 보니 컴활 1급 자격증을 취득하겠다는 내 결심이 객기에 지나지 않는 것 같아 시작도 전에 기가 꺾였다. 다행히 수업은 어렵지 않게 따라갈 수 있었고 몰랐던 기술?을 배우는 재미도 쏠쏠했다. 하지만 기술을 익혀 내 것으로 만드는 데는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한 법. 매일 숙제가 주어졌고 20대 초반의 같은 반 학생들은 그날 배운 내용을 복습하기 위해 수업이 끝난 뒤에도 학원에 남아 자판을 두들겼다. 하지만 나는 학원이 마치면 부리나케 첫째 아이를 데리러 달려가야 했다. 그렇게 첫째를 데리고 와서 간식을 먹이고 학원에 데려다주면 그다음은 둘째와의 시간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약물 치료 이후 둘째는 유치원에 있는 낮 동안은 몰라보게 의젓해졌지만 약 기운이 떨어지는 오후 4시 이후부터는 예전의 그 천둥벌거숭이로 돌아갔기에 둘째를 두고 내 공부를 하는 것은 엄두도 내지 못할 일이었다. 내게 허락된 시간은 아이들이 모두 잠든 새벽뿐이었고 나는 잠을 줄여가며 학원에서 배운 내용을 복습하는 한편 필기시험까지 준비해야 했다. 그렇게 치열하게 두 주를 보내고 의고사 점수가 70점을 넘기자마자 필기시험을 접수했다. 나름 최선을 다 했지만 인터넷에 떠 도는 통상적 준비기간 보다 공부 시간이 턱없이 부족했기에 시험은 녹록지 않았다. 확실히 아는 문제가 절반, 기억을 더듬고 논리를 짜 맞추어 풀어낸 문제가 절반, 합불에 대한 감이 오지 않아 합격점(60점)만 받기를 바라며 하루를 보냈다. 아이가 받아왔다면 세상이 무너진 듯 굴었을 60점 간절히 바라고 있는 꼴이 염치없었지만 짊어지고 있는 짐을 하루라도 빨리 려놓고 싶은 마음이 더 컸기에 부끄러운 줄도 몰랐다.

결과는 다행히 합격. 이제 학원 수업에 매진하며 실기시험만 준비하면 되었다. 그런데 한 짐을 내려놓으면 가벼워질 줄 알았던 마음이 외려 맥없이 풀어졌다. 그동안의 보상이라도 받듯 늘어지게 잠을 자고 남의 집 담장 넘보듯 세간의 이 소식 저 소식을 스마트폰으로 기웃거렸다. 전 펜싱 국가대표와 그 재혼 상대였던 이의  이야기, 목소리 좋은 배우의 마약 투약 이야기, 시답잖은 이야기들 속에서 드라마 '연인'에 대한 기사가 눈에 띄었다. 기사 속에는 여주인공인 듯 보이는 여인의 풋풋하고 귀여운 얼굴이 실려있었다. 나는 고운 얼굴에 끌려 인터넷에 떠도는 드라마 '연인'의 짧은 영상을 찾아보기 시작했다.


K드라마 열풍의 숨은 주역들은 편집도 참 잘해놔서 1분짜리 영상을 보던 나에게 20분짜리 요약본을 찾아보게 하더니 끝내 OTT 서비스에 가입하게 만들어버렸다. 역시나 내게 허락된 시간은 아이들이 잠든 사이, 복지센터에서 사이클을 타는 사이뿐이었으나 그 짧은 시간 동안 드라마 속 '장현'과 '길채'의 사랑 이야기에 녹아들고 있었다. 정확히는 길채를 향한 장현의 마음에 녹아들고 있었다.  


"난 길채 하나면 돼. 발칙한 길채. 유순한 길채. 나를 사랑하지 않는 길채. 나를 사랑하는 길채. 그 무엇이든 나는 길채 하나면 돼." (연인, 장현의 대사 중)


하... 정말 이렇게 멋진 남자라니....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별의 이유를 이렇게 대곤 한다. 

사귀어 보니, 사귄 지 오래되고 보니, 결혼을 하고 보니, 아이를 낳고 보니 사람이 바뀌더라고 그래서 힘들었다고..... 나 역시 그래왔다. 그런데 길채에게 건네는 장현의 고백을 듣고 니 사랑이라 예쁘게 포장해 온 감정들이 실은 사랑이 아니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랜 세월 변하지 않은 장현의 마음처럼 단단하고 반짝이는 그 무엇. 사랑이 그런 것이라면 나는 죽기 전에 그 사랑이라는 것을 한 번 해 볼 수 있을지....  


반 팔십이 넘는 나는 주책스럽게도 이렇게 '연인' 앓이인지 장현 앓이인지 사랑병인지 모를 이유로 잠 못 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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