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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부리 Jan 24. 2024

동병상련_(하)

고부를 넘어서

그 말을 뱉기 전까지의 나는 울분으로 가득 차 있었다. 어머님의 수척해진 얼굴, 늘어난 흰머리를 볼 수 없었다.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 몹쓸 말을 뱉어내자 기다렸다는 듯 모든 게 눈에 들어왔다. 내 입을 빠져나간 그 말은 이내 후회라는 메아리가 되어 가슴에 들어앉았다. 쓰러져 있는 사람이 내민 손을 밟아 뭉그러뜨린 천하에 몹쓸 인간과 다를 바 없다고 느꼈던 것 같다. 그래서 그 일이 있은 뒤로 어머님의 얼굴을 뵙는 일은 거의 없었다. 일부러 피해 다녔다는 말이 더 맞았다.


하지만 아이 아빠의 외도사실이 또다시 드러나고 이혼을 결정하게 되자 죄책감을 핑계 삼아 더 이상 피해 다닐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조정기간을 지나 이혼이 최종적으로 확정되던 날, 나는 정갈하게 포장된 백명란 한 상자를 손에 꼭 쥐고 어머님을 찾아뵈었다.


"그간 감사했습니다. 그리고...  죄송합니다."


목이 메어 더 자세한 말을 할 수 없었다. 서술어만 존재하는 발화였지만 어머님은 알아들으시는 것 같았다. 꼿꼿하게 저 먼 곳 어디를 향하던 어머님의 고개가 조금씩 흔들리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나는 7년 넘는 결혼 생활의 종지부를 찍은 그날, 이제는 인척도 아닌 완전히 남이 된 어머님과 두 시간 넘게 이야기를 나누었다. 내가 했던 말이라곤 '네' 혹은 '아니요'가 전부였기에 대화의 주인은 어머님이셨다. 내게 느끼신 실망, 서운함을 융단폭격처럼 쏟아낸 어머님은  눈물과 걱정, 미안함을 자욱하게 드리우고 나서야 이야기를 끝내셨다.

 

"이제 이렇게 가면 보기 어렵겠구나. 와 줘서 고맙다."

"......"

"애들 혼자 키우는 게 보통 일이 아니다. 힘든 일 있으면 주저 말고 연락해라. 알았지?"

"네."


집을 나서는 내 손을 잡으며 건네신 마지막 인사, 촉촉한 눈가. 어떤 의미였을까? 시어머니로써의 임무를 끝낸 후련함? 혹은 자식 둘을 짊어지고 세상이라는 전쟁터에 출전하는 젊은 병사를 향한 측은함?


그것이 무엇이든 나는 그날 어머님의 얼굴이 마치 전역을 앞둔 노병 같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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