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부리 Aug 18. 2023

가을이 온다

휴직일기_2023.08.15.

올초에 산 아파트 외에 언제 쓰러져도 이상하지 않을 집 한 채가 더 있다. 분가 후에 엄마와 다시 합가 할 것을 염두에 두고 아파트는 죽어도 싫다는 엄마의 취향을 고려해 100평이 조금 안 되는 땅에 허물어져가는 집 한 채를 사둔 것이다. 돈이 좀 모이면 허물고 다시 지을 생각이었는데 집이 워낙 험해 동네에 흉물이 되는 것 같고 안전에도 문제가 되는 듯하여 내년쯤 깨끗하게 허물어버리기로 했다.

그런데 아무리 허물어버릴 집이라 태풍 끝에 별 탈은 없는지 궁금했다. 낡은 기와지붕 아래로 덧댄 슬레이트 처마가 람에 날려가 다른 집에 피해를 주진 않았는지 대문 앞 감나무 가지가 부러져 길 가는 사람 통행을 방해하고 있는 건 아닌지 한 번은 다녀와야 할 것 같았다.


집은 곧 쓰러질 듯하면서도 굳건하게 잘 서 있었다. 슬레이트 처마도 그대로였고 감이 열지 않는 감나무 가지도 멀쩡했다. 그런데 이게 무슨 일인가? 봄에 와 보았을 때, 제 구실 못 할 것 같다고 생각했던 시커먼 밤나무에 밤송이가 올망졸망 매달렸다. 거기에 올 된 녀석 몇은 이미 입을 제법 벌리고 나 여기 있소~~! 하고 외치는 듯했다. 들고 갔던 빗자루로 입 벌린 밤송이 몇 개를 땅에 떨어뜨렸다. 운동화 신은 두 발을 벌어진 밤송이 양끝에 얹어 살짝 체중을 실으니 알밤이 톡톡 하고 올라온다. 


벌써 가을인가?

그러고 보니 입추가 지났다.

볕은 여전히 뜨겁고 매미의 짝 찾기도 끝나지 않았지만 귀뚜라미 소리가 매미 울음 사이를 비집고 나오는 걸 보니 가을이 오는 게 맞나 보다. 시골에 오래 살면 나무와 풀의 색, 냄새, 냄새 사이를 떠다니는 소리, 살에 닿는 바람으로 계절을 느끼게 된다. 농사를 짓지 않아도 시골살이 20년쯤 되면 자연스레 알게 되는 분절이 없으면서도 확실한 계절의 경계.


시냇물 흐르는 소리가 제법 또렷해지면 들판에 초록이 돋고 소거름 냄새가 온 마을에 진동한다. 머지않아 모내기가 시작되개구리울음소리가 온 마을을 가득 채운다. 초록이 맹렬하게 뻗치면 매미가, 벼 이삭이 여물어갈 즈음에는 귀뚜라미가 개구리의 바통을 이어받아 인적 드문 마을에 활기를 불어넣는다. 그렇게 한적한 시골 마을에 봄이, 여름이, 가을이 가고 차가운 겨울이 찾아온다.


봄에 시작한 휴직도 여름을 지나 어느덧 가을로 향하고 있다. 봄은 독학사 시험 준비로, 여름은 이직 실패로 인한 절망감에 허덕이며 보냈다. 같은 시간, 내가 소득 없는 허우적거림을 반복하는 동안 밤나무는 죽음의 위기를 넘기고 살아나 제법 건실한 알밤을 맺어냈다. 죽을 것 같이 힘들고 지칠 때, 묵묵히 견뎌내는 인내가 필요하다는  몸소 보여주려 한 것일까? 모르겠다. 죽어가던 나무가 어찌 살아났건, 왜 살아났건 간에 이번 가을에는 밤나무 열매를 주우러 구옥에 자주 들를테다. 


밤이 제법 모이면 너무 많은 곳에 정신 팔지 말고 따땃한 방에 앉아 회생한 밤나무의 알맹이를 까먹어야지. 애태우지 말고 속단하지 말고, 알밤처럼 여물어지는 가을을 보내야지.


작가의 이전글 산에 오른다는 것은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