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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소리 Jun 11. 2021

이어지는 사랑



나에겐 친 이모가 없다. 우리 엄마는 남동생만 셋이 있는 장녀이기 때문이다. 고모는 있다. 우리 고모는 내가 정말 존경하는 어른이지만 왠지 이모라는 단어와는 성격이 좀 다르게 다가온다. 영화 [리틀 포레스트]에서도 주인공이 이런 대사를 하지 않는가. "고모는 고모다. 이모가 아니다."



격의 없이 이모들과 지내는 친구들을 보면서 종종 생각하곤 했다. 때론 친구처럼, 때론 든든한 언니처럼 곁에 있어주는 이모가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다른 어른들과는 나눠지지 않는 내밀한 이야기들을 할 정도로 가깝지만, 내 삶에 대단히 간섭하지는 않는 그런 존재. 물론 세상 모든 이모들이 조카와 이런 이상적인 관계는 아닐 거다. 내게 이모가 없으니까 이렇게 상상의 나래를 펼치는 거겠지.



하지만 신은 나에게 언니를 주었다. 동성인 데다 엄마보다 간섭을 덜 한다는 면에서 이모 비슷한 존재이지 않았나 싶다. 어릴 적 나는 언니 꽁무니를 죽어라 쫓아다녔다. 우리 언니 한아름은 어릴 땐 나의 존재를 싫어했다고, 정말 무지하게 싫어했다고 웃으며 고백하고는 한다. 그 말을 들으면, 나에게 직접적으로 짜증은 못 내고 허공을 향해 뭐라 뭐라 혼잣말을 하며 분을 삭이고 있는 어린 언니의 모습이 어렴풋이 기억난다. 아마도 부모님에게 '네가 언니니까 양보해라'라던가 '동생 잘 챙겨야지'라는 말을 들은 직후의 모습인 듯하다.



나는 그때도 지금도 언니가 마냥 좋다. 동생 포지션은 정말 짱이다. 엄마가 우리 둘 만 낳아서 내가 막내인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나에게 아직까지 어떤 해맑음이 존재한다면, 그건 다 우리 언니 한아름의 K 장녀로서의 인내심 때문이다. 한 번은 이런 일이 있었다. 시험기간이라 도서관에 가서 공부를 하겠다는 언니를 따라나선 날이었다. 중학생이던 언니는 혼자 가겠다고 했지만 나는 얌전히 있을 테니 데려가 달라고 고집을 부렸다. 내가 바라본 세 살 많은 언니의 세계는 내 또래에게선 찾아볼 수 없는 어떤 성숙함과 멋있음이 느껴졌다. 항상 일정한 거리로 나보다 먼저 어른이 되어가는 언니를 동경했다. 언니가 아니라면 초등학생인 내가 그 저녁에 도서관에 가서 공부를 해볼 수 있었겠는가 말이다.



그렇게 언니는 웬수 같은 내 손을 잡고 도서관으로 향했다. 버스를 타고 도착한 시립 도서관은 안팎으로 교복을 입은 언니 오빠들이 많았다. 3층으로 올라가니 여자 공부방과 남자 공부방이 따로 있었다. 자판기가 있는 휴게실을 지나 공간으로 들어서자 칸막이 없는 커다란 책상들이 있었고, 한 책상 당 6명 정도가 앉을 수 있는 구조였다. 나는 언니 옆에 앉고 싶었지만 자리가 없어서 대각선 맞은편에 앉아 챙겨 온 책들을 괜히 쌓아놓았다. 조용한 분위기에 압도되어 눈치를 살피고 있는 나에게 언니는 속삭이며 간단한 도서관 이용법을 알려주고는 제자리로 돌아가 문제집을 펼치고 공부를 시작했다. 나도 책 하나를 집어 펼치고 집중해서 읽었던 것 같은데...... 정신 차리고 보니 침 흘리며 엎드려 자고 있었다. 완전한 숙면이었다. 죄다 초면인 사람들 사이에서 이렇게까지 푹 잘 수 있다는 사실에 놀라며 고개를 들어 주변을 살폈는데 언니가 없는 거다. 짐이 있는 걸 보니 날 두고 간 것 같지는 않은데 어디 있는 걸까. 잠시 멍해 있던 나는 조용히 걸어 나가 휴게실을 향했다. 다행히 언니는 거기에 있었다.



무구한 표정으로 다가오는 날 보며 언니는 깊은 한숨을 쉬었다. 그러더니 공부방으로 돌아가서 내 짐과 본인 짐을 다 챙겨서 나오라고 했다. 나는 어리둥절해하며 시키는 대로 했다. 그렇게 집으로 향하는 길에 들은 언니의 말은 너무 웃겼는데, 내가 거의 오 분 만에 잠들어서는 얼마 안 있다가 방귀를 뀌었다는 거다. 그 조용하고, 넓고, 사람 많고, 천장 높은 도서관 안에 울려 퍼지던 방귀 소리를 듣고 언니는 본능적으로 나를 바라봤을 거다. 거기서 당당히 엎드려 자고 있던 단 한 사람. 범인은 당연히 자신의 동생이라는 걸 누구보다 먼저 감지했겠지. 사람들은 키득키득 웃기 시작했고 언니는 너무 창피해서 문제집 하나를 가지고 휴게실로 가, 거기서 공부를 했다고 한다. 다시 들어갈 낮도 없어서 나를 시켜 짐을 빼오라고 한 것이다. 나야 아는 사람이 하나도 없었거니와 스스로의 만행이 기억나지 않아 창피하고 말고 할 것도 없었지만, 우리 언니의 입장은 아주 달랐다. 그 방엔 언니 친구들도 있었고 얼굴이 익은 학교 동급생들도 있었을 테니 말이다. 훗날 이 이야기를 언니에게 하니 기억이 안 난다고 하면서, 그 이유는 이런 일이 일상이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외동딸이었던 언니의 삶에 불현듯 내가 나타나 부모의 관심을 억지로 나눠 가져야 하는 것도 억울한데, 보호자 노릇까지 해야 했으니 얼마나 짜증 났을까.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외적으로 우월한 유전자는 언니가 다 가져갔다. 아빠의 큰 키와 엄마의 진한 쌍꺼풀을 혼자 차지한 언니는, 가끔 거울 속 자신과 나를 번갈아 보며 '나는 이렇게 예쁜데 내 동생은 왜......' 하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고 한다. 그렇게 언니가 날 측은하게 바라보고 있을 때, 나 역시 언니를 측은하게 바라보고는 했는데, 그건 바로 안타까운 패션 센스 때문이었다. 물론 내가 옷을 잘 입는 건 아니다. 하지만 나는 나름의 패션 철학(이라 쓰고 '고집'이라 읽는다.)이 있어서 절대 엄마가 골라 준 옷은 입지 않았다. 엄마가 입혀준 그대로 군말 없이 밖에 나가는 언니를 보면 그저 신기할 뿐이었다. 그중 가장 기억에 남는 건, 여름이면 부모님이 우리 머리에 씌워주려 했던 꽃 분홍색 썬 캡이었다. 당연히 나는 그 모자 쓰기를 온몸으로 거부했다. 색깔 때문만은 아니었다. 모자의 이마 부분에 '샬롬!'이라고 커다랗게, 그것도 궁서체로 쓰여있었기 때문이다. 브랜드 로고가 아니라 커다란 궁서체 말이다. 아마도 어디 교회에서 나눠준, 그 시대의 굿즈 개념의 물건이었던 거 같다. 우리 언니는 그 모자를 몇 해에 걸쳐 여름 내내 정말 잘 쓰고 다녔다. 결코 나에겐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얼마 전 우리 둘은 마주 앉아 어릴 적 이야기를 나눴다. 언니는, 심부름도 잘하고 말도 잘 듣는 친구들의 동생을 보면 너무 부러웠다고 했다. '부려 먹을 수 있는 존재'로서의 동생이 있다는 것을 목격하고, 내 동생은 왜 저런 순종적인 면이 없을까 싶었단다. 생각해 보니 나는 언니의 심부름을 한 기억도, 잔소리를 들은 기억도 딱히 없다. 드라마 [응답하라 1988]에서 공부 못하는 동생의 머리를 쥐어박으며 닭대가리 운운하는 자매의 모습과 우리는 한참 다르긴 하다. 둘이 박 터지게 싸우다 먼저 우는 것도 항상 언니였다. 내가 "언니는 너무 착해서 카리스마가 전혀 없었어."라고 했더니 맞다며 깔깔깔 웃었다.



언니와 대화하다 보면 내가 어린이 시절에 끼친 수많은 민폐의 순간들이 영화 장면처럼 떠오른다. 가족을 비롯해 참 많은 타인들의 이해와 인내 속에서 좋은 속도로 어른이 되어왔구나 싶다. 은유 작가님의 ‘삶이란 타자에게 빚진 삶’의 줄임말이고, 나의 경험이란 나를 아는 모든 나와 나를 모르는 모든 나의 합작품인데, 누구도 삶의 사적 소유를 주장할 수 없다.'라고 하셨던 오래전 인터뷰 글이 생각난다. 나는 '삶의 사적 소유를 주장할 수 없다'는 그 말을, 성숙한 사회의 일원으로서 '공적인 삶'을 늘 인식하고 살아야 한다는 뜻으로 받아들였다. 그건 곧 '타인을 향한 조건 없는 선의'의 영역이 언제나 우리 삶에 일정한 크기로 있어야 한다는 거다. 내가 그렇게 자라왔으니 말이다.






9년 전 언니는 첫째 조카 유은이를 낳았다. 나는 눈도 다 뜨지 못한 채 꼬물거리는 그 애를 품에 안고 속삭였다. "내가 언니에게 받은 사랑, 너에게 다 돌려줄게." 우리 언니가 나로 인해 가졌을, 첫째로서의 서러움이 만약 유은이에게도 생기게 된다면, 나의 무한한 사랑으로 그 결핍을 최대한 채워주리라 마음먹었다. 매우 자연스러운 다짐이었다.



여전히 나는 조카 바보로서의 포지션을 굳건히 지키고 있다. 어릴 적 그토록 꿈꿔왔던 '이모'의 존재를 스스로 구현함으로써 자기만족을 하고 있는 셈이다. 최근엔 10년 만에 다시 취직을 한 언니를 위해 조카 둘을 하원 시키고 저녁까지 봐주고 있다. 내 일은 점심이면 끝나기 때문이다. 덕분에 언니와 형부에게 낭낭하게 용돈도 받고 있다. 가끔 유은이에게 말한다 "넌 좋겠다 이런 이모 있어서." 그러면 어릴 적 언니와 똑같은 얼굴을 한 유은이는 어깨를 으쓱하며 말한다. "응 좋아!"



작년에 딩크를 고민하며 샀던 책 [엄마는 되지 않기로 했습니다]에는 이런 글이 인용되어 있었다.



세상에는 세 부류의 여자가 있다. 어머니의 운명을 타고난 여자, 이모의 운명을 타고난 여자, 그리고 아이로부터 반경 3미터 내에 있어서는 안 되는 여자.



아직 다 살아보지 않았으니 모르는 일이지만, 아마도 나는 '이모의 운명을 타고난 여자'인 것 같다. 매우 만족스러운 타이틀이다. 나는 아이들을 굉장히 좋아하지만 공공연히 떠들고 다니진 않는데, 왜냐하면 그걸 내 입으로 이야기하는 순간 "네 애 낳아봐라 더 이쁘다." 내지는 "너도 애 낳을 때가 됐구나."라는 말을 듣기 때문이다. "아이를 좋아한다."는 말이 꼭 "출산을 하겠다."는 말과 동의어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치부되는 이 납작한 세상.






나는 조카들을 위해서라면 목숨도 아깝지 않다. 그렇다고 딱히 아이들에게 원하는 것이 있는 것도 아니다. 그저  자신으로 자라주기만을 바랄 뿐이다. 유은이의 존재는 나에게 이전엔 없던 시선 하나를 만들어 주었다. 김소영 작가님의  제목을 빌리자면 '어린이라는 세계' 알게   것이다. 또한  자식이 아닌 조카이기 때문에, '가족 이기주의'로부터 어렵지 않게 일정 거리를 유지하며 고유한 인격체로서의 '사회 속의 어린이' 인식하게 되었다.



내가 받았던 조건 없는 사랑을 돌려주고 싶은 마음 하나, 존중받는 어린이 시절을 경험케 해주고 싶은 마음 하나를 더해. 내 조카 보듯, 지나가는 아이들을 본다. 어떤 아이도 사회성을 완전히 습득한 다음에 어른들을 만나진 않는다. 하루에도 몇 번씩 마주치는 모르는 어른들의 이해와 너그러운 미소가 한 아이를 온전한 속도로 자라게 만드는 것이라 믿는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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