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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소리 Jun 23. 2021

하루키와 굴튀김과 나 자신




속이 시끄러워 갑자기 책장 정리를 한 적이 있다. 오랫동안 소설과 비소설, 그림책과 시집 정도로 나누어져 있었는데, 이번엔 새로운 분류법을 적용해 보았다. 그건 바로 '색깔별로 정리하기'였다. 처음 해보는 시도로 순전히 내 기분을 위한 것이었다. 비슷한 색의 책등끼리 모아 꽂다 보니, 밑 칸 구석에 방치되어 있던 책들도 위로 올라오게 되었는데 거기서 오래되어 표지의 색이 바랜 책 하나를 발견했다. 안쪽 장을 펼쳐 보니 구입한 날짜와 장소가 적혀 있었다. 무려 17년 전에 지금은 사라진 동네 서점에서 산 것이었다. 당시에 출판계에서 유행하던, 사진이 잔뜩 포함된 여행 에세이 같은 거였는데 다시 보니 내용이 조금 유치했다. 감성적인 글귀로 가득 찬 이 책을 들고 다니며, 앞으로 펼쳐질 나의 미래에 대해 한없이 낙관하던 그때가 떠올랐다. 스스로에게 부여한 예술가 정체성에 취해 비장한 문구들을 다이어리에 쓰고 다니던 때였다.


과거의 물건 속엔 과거의 내가 있다. 그렇기에 이삿짐 정리나 대청소 같은 걸 하면 진도가 영 안 나가는 것이다. 자꾸 물건과 함께 시간 여행을 하느라 현재로 돌아오질 못하니까 말이다.


과거가 쌓여간다는 감각이 나는 좋다. 이건 나이 드는 것이 좋다는 말로는 다 설명되지 않는 무언가다. 쌓인 과거가 많을수록, 이른바 '쪽팔림의 역사'가 풍부할수록 사람은 자기 자신을 잘 알아가게 되는 것 같다. 과거가 아직 없다는 건, 그러니까 어리다는 건,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발견할 수 있는 힌트가 적다는 거다. 우리의 어린 시절이 그토록 혼란스럽고 불안했던 이유가 아닐까. 그래서 나는 과거가 쌓여가는 것이 좋다. 스스로의 취향과 성향을 잘 이해하기에, 삶의 즐거움을 능동적으로 취할 수 있는 지금의 내가 좋다. 비록 그것이 하루 종일 넷플릭스를 보는 행위일지라도.






요즘엔 무라카미 하루키의 서평이나 수상소감, 미발표 에세이 등 여러 종류의 짧은 글들이 묶여있는 [잡문집]이라는 책을 읽고 있다. 이 책의 첫 글 제목은 '자기란 무엇인가'인데 밑에 작게 쓰여있는 부제목은 생뚱맞게도 '혹은 맛있는 굴튀김 먹는 법'이다. 자아 성찰과 굴튀김이 무슨 관계란 말인가. 하는 궁금증으로 페이지를 넘겼다.


하루키는 소설가가 넓은 광장에 가설들을 쌓아 올리면 독자들은 그것들을 자기만의 배열로 정리한다고 했다. 개인적인 질서로 말이다. 그건 무의식중에 일어나는 일이고 그 과정 때문에 소설을 읽을 때 독자들은 자기 삶에 실제 하는 무언가로 이야기를 '판단'할 수 있게 되는 것이라고 하는데 완전히 동의했다.


이어 '그렇기 때문에 자기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은 소설가에겐 의미가 없다'라고 한다. 하루키는 뭐라 뭐라 좀 어렵게 써 놨지만 내가 이해하기론. 앞서 말 한 '광장에 이야기를 쌓아놓는 것'자체가 스스로를 설명하는 것이라 말하는 듯했다.


그래서 누군가 '자기란 무엇인가'에 대해 원고지 4매로 쓰는 것이 가능한지 하루키에게 묻자, 그는




그건 분명히 불가능할 것입니다. 다만 자기 자신에 관해 쓰는 것은 불가능하더라도, 예를 들어 굴튀김에 관해 원고지 4매 이내로 쓰는 일은 가능하겠죠. 그렇다면 굴튀김에 관해 써보시는 건 어떨까요. 당신이 굴튀김에 관한 글을 쓰면, 당신과 굴튀김의 상관관계나 거리감이 자동적으로 표현되게 마련입니다. (...)




라고 했다. 그러면서 소설가들은 자기란 무엇인가?라고 생각하자마자 (생각할 틈도 없이) 굴튀김이나 새우 크로켓에 관한 글을 써나간다고 했다.


대학 시절 가장 좋아했던 '싱어송라이터 워크숍'수업이 생각났다. 돌아가며 자작곡을 준비해 오고, 그 주 발표자의 곡을 듣고 각자 자신의 감상을 이야기하는 소규모 수업이었는데. 내 곡을 가져가 연주하는 날이 가장 긴장되긴 했지만 그 못지않게 매주 내 생각을 말해야 하는 순서가 오면 참 어려웠다. 그리고 그 어려움을 통해 나 자신을 많이 알게 되었다.


그러니까 내가 쓴 곡을 통해 내가 드러난 것이 아니라, '곡에 대해 말하는 나'를 통해 내가 드러났던 것이다. 하루키는 그 결을 이야기하는 것 같았다.


존재에 대한 원론적 논의가 필요할 때가 있을지 모르나, 사실 '자기란 무엇인가'의 답은 대부분 내가 좋아하는, 또는 싫어하는 무언가에 대해 말하고 있을 때 자연스럽게 드러난다. 그러니 사소한 이야기들을 많이 꺼내고 살면 좋겠다. 그러면 나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내가 글을 쓰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나의 '굴튀김 이야기'는 무엇이 될 수 있을까. 우선 나는 무용한 것들이 좋다. 존재하지 않아도 나의 생명 연장에 지장을 주지 않는 것들 말이다. 지금 내 핸드폰에는 게임이 단 한 개 깔려있다. [10X10]이라는 이름으로, 100개의 정사각형 틀에 여러 모양의 블록을 채우는 방식이다. 가로나 세로로 틈 없이 블록이 채워지면 그 줄이 사라지는 일종의 테트리스 게임이다. 경쟁하는 상대가 없다는 면에서, 시간 제약이 없다는 면에서, 아무 생각 없이 블록을 빈칸에 가져다 놓는 반복된 행위만 하면 된다는 면에서 내겐 너무나도 완벽한 게임이다.


큐브 맞추기도 좋아한다. 몇 년 전에 유튜브에서 공식을 보고 연습한 뒤부터, 스트레스를 받을 때면 큐브를 꺼내 들고 머리를 비운 뒤 손이 외운 대로 섞었다 맞췄다를 반복한다. 뜨개질을 하는 것도, 바느질을 하는 것도 좋아한다. 가끔 양말을 기워 신고, 구멍 난 옷들을 손바느질로 수선하기도 하는데 그건 정말이지 순전히 그 행위가 좋아서이다. 결코 돈이 없어서 그런 것이 아니다. 잠깐만 왜 눈물이 나지.


하여튼 위에 열거한 취미 모두가 '공식을 외운 뒤 아무 생각 없이 손을 놀린다'라는 공통된 특성이 있다. 나의 이런 성향을 잘 알고 있는 누군가가 크리스마스 입체카드를 만드는 부업을 소개해 준 적이 있는데, 2주 정도를 해 보았다가 확신했다. 정말 나와 잘 맞는 일이라는 것을. 집에서 혼자 단순노동을 반복하면서 좋아하는 라디오를 듣거나 영화를 보고, 가끔 커피를 내려 먹으며 일을 하니 정말 평화로웠다. 다만 들이는 시간에 비해 수입이 너무하다 싶게 적어서 이어나갈 수 없던 것이 아쉬울 뿐이었다.



싫어하는 것은 '전화'와 '너무 밝은 빛'이다. 사실 '싫어함' 보다 일종의 '공포'에 가깝다. 나는 가능한 때에 확인하고, 충분히 생각한 뒤 답을 하는 소통 방식인, 문자나 메일이 좋다. 갑자기 오는 전화는, 누군가 약속도 없이 찾아와 현관문을 쾅쾅쾅 두드리는 듯한 충격을 나에게 준다. 물론 발신인을 확인한 뒤의 상황은 아주 달라지지만 말이다.


'너무 밝은 ' 정확히 언제부터 힘들어했는지 기억이 나진 않는다. 우리  거실엔  노란 스탠드 불빛만 켜져 있고 화장실 조명도 수건을 덮어 어둡게 만들어 놓았다. 나를  아는 친구들은 내가 집에 놀러 가면 형광등부터 꺼준다. (고맙다 얘들아.  친구 하느라 고생이 많다.) 커피숍이나 식당도 조명이 너무 밝으면 들어가기 꺼려진다. 케이크가 너무 먹고 싶었던 어느  근처에서 전문숍을 발견하곤 기쁜 마음으로 들어가려 했던 적이 있다. 그런데 가까이 가보니 바닥부터 천장까지 죄다 하얀색 인테리어로 빛나고 있었다. 결국 들어가지 못하고 편의점 케이크를 사서 집에  먹은 적도 있다.


이런 나 때문에 강제로 어둠 속에서 살아야 하는 동거인은 가끔 주말에 내가 늦잠을 자고 있을 때에만 겨우 형광등을 켜 두고 집안일을 한다. 그러다 오후에 일어난 내가 무심코 방문을 열게 되는 때가 있는데, 갑자기 쬐어지는 불빛을 받고선 나도 모르게 햇빛에 피부가 데인 흡혈귀처럼 비명을 지르게 된다. 그러면 동거인은 가지가지한다는 표정으로 일어나 스위치를 꺼준다. 나는 고맙다고 말한 뒤 노란 조명을 켠다.



약간의 우주 공포증 같은 것도 있다. 영화 [그래비티]를 영화관에서 큰 스크린으로 본 날 감지한 것이다. 심하지는 않지만 감히 짐작도 되지 않는 커다란 공간을 상상하면 심장이 두근거리고 조금 안절부절해진다. 우주 행성들의 크기를 시각적으로 비교해 설명하는 영상을 재생시킨 적도 있는데 결국 끝까지 보진 못했다.






누군가는 이런 나를 유별나다고 할 수도 있다. 이렇게 글로 쓰면서 조금 부끄러웠다. 너무 예민한 사람처럼 보이진 않을까. 문제가 있는 걸로 여겨지진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 있긴 했지만. 그냥 나 같은 사람도 있다는 걸 말하고 싶다. 그리고 나 역시 주변 사람들의 이런 사소한 면면들을 알고 싶다. 이해하고 싶기 때문이다. 당신의 '굴튀김' 이야기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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