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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소리 Apr 23. 2022

애쓰고 있다

마주하기와 도망가기



때론 내 삶의 자잘한 인연들로부터 훌쩍 떠나버리고 싶다. 관계의 나무를 커다란 줄기만 남겨놓고 가지치기 하는 상상을 한다. 이 세상에 내 존재를 아는 사람은 두 명 정도면 충분하다. 그런 생각.

오 분도 안 가 내가 나에게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걸 깨닫는다. 그냥 삶을 다시 시작하고 싶은 마음이 아니던가. 새롭게 시작하고 싶은 마음. 처음부터 다시 살고 싶은 마음. 지금의 나로부터 도망가고 싶은 마음.

지금의 내가 아닌 전혀 다른 사람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한 번도 안 해본 이가 있을까. 어떤 이는 살던 곳을 떠나 낯선 환경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하기도 하고, 어떤 이는 개명을 해보기도 한다. 또 어떤 이는 온라인상에서 실제 자신의 모습과는 다른 정체성을 만들어 활동하기도 하고, 어떤 이는 스스로를 마주하지 못해 병이 들어버린다.


지나온 나와 살아갈 나 사이에 끼어 버둥대고 있는 기분이 드는 요즘. 삶을 게임처럼 리셋할 수는 없으니 방법을 찾아야 한다. 그래서 나는 요즘 '마주하기'와 '잠시 도망가기'를 번갈아 하며 삶의 균형을 찾아보려 애쓰고 있다.



I 마주하기 I

일기를 쓴다. 몇 해 전부터 블로그에 일기를 올리고 있다. [사진 일기]와 [고양이 혀]라는 게시판 두 개를 만들어 [사진 일기]에는 말 그대로 영상이나 사진을 위주로 가볍게 먹고 본 것들을 올리고, [고양이 혀]에는 마음속 이야기를 그때그때 마구 써 내려간 일기를 올린다.


친한 친구 몇 명과, 친하진 않아도 내 일기 보여주는 것이 불편하지 않은 몇 명이 '서로이웃'으로 설정되어 있다. 나는 주로 '서로이웃 공개' 아니면 '비공개'로 글을 쓴다. 내 친구들은 그 일기를 성의 있게 봐준다. 그러고는 마음을 담아 댓글을 달아준다. 나는 안전함을 느낀다. 안전한 곳에서 마음을 분출하는 거다. 혼자는 외롭다.


신뢰하는 사람에게만 보여주는 일기, 보여주고 싶은 일기, 그 속에서 나는 오해받을지도 모른다, 잘못 해석될지도 모른다, 들킬지도 모른다, 하는 두려움 없이 투명하게 마음을 꺼내 보일 수 있다. 간혹 친구들에게도 공개하기 어려운 못나고 못된 마음을 꺼내고 싶을 땐 '비공개'설정을 사용한다. 그렇게 머릿속에 갇힌 감정들이, 일기라는 글이 되어 잠시 나를 떠나있으면 내 마음의 정체를 보다 쉽게 발견할 수 있게 된다. 미움, 후회, 질투, 분노, 열패감 같은 것들이 일기로 인해 둥둥 떠오르면 그제야 '거기 있는 게 너였구나...' 하게 되는 거다.


-


산책하며 음악을 듣는다. 늘 라디오나 팟캐스트를 듣고 다니던 나였는데 얼마 전부터는 다시 음악을 듣기 시작했다. 우습게도 나는 친한 음악인이 앨범을 내지 않는 이상 일부러 음악을 찾아 듣는 일은 잘 없었다. 어릴 때는 매일 레코드숍에 가서 CD 사는데 용돈을 다 쓰거나 몇 곡 들어가지도 않는 엠피스리 플레이어를 들고 다니며 좋아하는 앨범들을 곡 순서까지 통째로 다 외우고는 했는데 어느 순간부터 나는 음악보다 사람들 말소리 듣는 것을 더 좋아하고 있었다.


같이 사는 김종현은 네이버 뮤직 정기결제를 이용 중이라 매달 60곡을 다운로드할 수 있다. 그래서 월 말이 되면 나에게 받고 싶은 앨범이 있는지 물어보고는 한다. 그로 인해 노래를 야금야금 다시 듣기 시작하다가 최근에 김종현을 통해 받아놓았던 음악들을 죄다 핸드폰으로 옮겨서 본격적으로 듣고 다니기 시작한 것이다. 요즘 내 플레이 리스트에는 아주 오래된 가요 앨범도 있고 최신 인디 음악도 있고 아이돌 음악도 있고 친구들 음악도 있고 팝송도 있고 클래식도 있다.


산책하는 그날 그날의 기분에 따라 아티스트를 선택해 듣고 있으면, 이어폰을 귀에 꽂았다는 것만으로 이토록 쉽게 다른 세계에 들어와 있을 수 있다는 것이 새삼 신기하게 느껴진다. 얼마 전에는 정밀아의 [청파소나타] 앨범을 들으며 걷다가 '언니'라는 곡에서 눈물이 주르륵 흐르고 말았다. 1절은 언니에게 고민을 털어놓는 사람의 이야기가, 2절에는 마음을 다독여주는 언니의 답변이 담긴 노래였다.


참 따듯한 곡이네... 생각하다가 2절에 '오늘도 잘 살아낸 것 알아.'라는 가사를 듣자 그렇게 울어버린 것이다. 걸음을 멈추고 눈물을 닦아내며 알게 되었다. 내가 고단했다는 것을. 늘 이만하면 감사해야지, 나 정도면 힘들다는 말 하면 안 되지 그런 생각에 뭔가를 꾸역꾸역 참고 있었다는 걸 말이다.



I 잠시 도망가기 I

어제 있었던 일이다. 애정표현을 하러 나에게 다가온 김종현이 내가 시청하고 있던 영상을 보고서는 몸서리를 치며 도망갔다. 빠르게 방을 나가며 그는 이렇게 외쳤다. "아으으으 지겨운 좀비!!!" 나는 좀비 영화의 역사를 다룬 유튜브를 보고 있었다. 그의 반응을 보며 문득 생각했다. 나는 왜 이렇게 좀비 영화를 좋아하는 걸까. 공포, 호러물을 왜 이토록 좋아하는 걸까.


어이없게 들릴 수도 있겠지만 나에게 공포 영화란 디즈니 영화를 보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다. 현실과 완전히 동떨어져있다는 면에서 그렇다. [겨울왕국]의 엘사가 늘 억제되어왔던 자신의 슈퍼파워를 마음껏 발산하며 렛잇고 렛잇고 할 때 느껴지던 전율과 [스크림]에서 시드니가 두려움에 떨며 도망 다니다 살인자의 가슴에 우산을 찔러 넣을 때의 쾌감은 완전히 같은 것이다. 나는 영화 속에서 주인공과 함께 여러 번 죽다 살아나며 강한 존재가 된다.


내 삶과 비슷한, 마치 내 이야기 같은 잔잔한 영화를 볼 때도 좋음을 느끼지만 어딘가로 도망가고 싶을 땐 꼭 호러 영화를 본다. 얼마 전 "종현아 내가 만약 좀비가 되면 주저 없이 헤드샷을 날려줘. 나도 그렇게 할게."라고 총도 없는 주제에 말했다. 진심이었다. 사랑하는 사람의 몸이 좀비가 되어 떠돌게 둘 수는 없지 않은가. 그러면서 생각했다. 좀비 아포칼립스가 다가오면 나는 영화 속 주인공들처럼 샷건을 들며 싸우지 않고, 바로 감염되는 것을 선택할 것 같다고. 이것이 현실과 영화의 차이일 거라고 말이다. 그러니 좀비 아포칼립스는 절대 와서는 안된다. 나는 평범한 인생을 살다가 가끔 영화로 도피하는 지금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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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을 한다. 내 핸드폰에 깔려있는 단 하나의 게임. 10 X 10이라는 테트리스 종류의 블럭 맞추기 게임을 말이다. 내가 이 게임을 좋아하는 이유는 분명하다.

1. 누군가와 경쟁을 하는 게 아니다.

2. 시간제한이 없다.

3. 중간에 멈춰도 나중에 이어서 할 수 있다.

4. 아무 생각 없이 손만 놀릴 수 있다.

5. 요란한 게임 음악이 없다.


7년 넘게 이 게임만 하고 있다. 중간중간 펭귄들을 키운다거나 퀘스트를 완성하며 단계를 높여가는 게임들도 해본 적이 있지만 결국 내 핸드폰에 남아있는 것은 이것뿐이었다. 한 줄이 채워지면 뾰로롱 사라지는 블럭. 그 네모들과 함께 속세의 스트레스도 사라지는 것만 같아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그 게임을 한다.

어떤 날엔 공포영화를 보는 것과 게임을 동시에 하는데, 핸드폰과 노트북을 분주하게 오가는 나의 눈을 보던 김종현이 혀를 차며 지나간 적도 있다. 아마도 스트레스를 빠르게 해결하고픈 심리에서 나온 괴상한 행동이 아닐까 싶은데, 되도록이면 동시에 하는 건 피하려 한다. 눈이 너무 아프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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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은 계속된다. 나는 오늘도 애쓰고 있다. 좀비 영화 보는 게 뭐 애쓰는 거냐 할지 모르나 하여튼 그렇다. 나를 감당해야 하는 것은 언제나 나이기 때문에, 나는 나를 떠날 수 없기 때문에 나에게 잘 해줘야 한다. 애써 잘 해줘야 한다. 그걸 좀 더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기로 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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