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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소리 Feb 22. 2023

일상의 천재에게

영화 (패터슨)을 보고



P에게.


오늘은 10분 간격으로 설정해놓은 알람들을 울리는 족족 전부 끄고도 일어나지 못했습니다. 어젯밤 일찍이 잠자리에 들었는데도 그랬습니다. 지각에 대한 본능적인 공포가 저를 아슬아슬한 시간에 일어나게 했어요. 대충 세수를 하고 로션을 바른 뒤 유산균 먹는 것을 깜박하고 집을 나섰습니다. 서둘러 일터를 향해 걸으면서 생각했습니다. 꿈을 너무 많이 꾸어 숙면하지 못했던 건 아닐까 하고요. 꿈은 하룻밤에 하나면 충분한 것 같습니다. 아애 꿈 꿀 틈 없이 깊은 잠에 들면 그게 가장 좋고요.


이전엔 밤낮이 바뀐 생활을 했었습니다. 그게 저라는 사람에게 어울리는 리듬이라 생각했어요. 먼지 떨어지는 소리가 들릴 것만 같은 고요한 새벽이 되어야 일기도 잘 써지고 바느질도 재미있고 이런저런 삶에 대한 아이디어들이 막 떠오르곤 했으니까요. 그런데 지금은 12시 전에 잠들고 아침에 일어나는 평범한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생각보다 아주 좋네요. 제가 변한 걸까요? 아니면 지난 시간동안 스스로가 밤 인간이라 착각하며 살아왔던 걸까요?

몇 해 전 겨울, 초저녁에 잠에서 깬 날이 생각납니다. 거실에서 눈을 떴는데 사방이 어두웠어요. 약간의 노을빛 만 커튼 너머로 겨우 들어오고 있었어요. 아주 쓸쓸했어요. 무기력하고 슬펐습니다. 그런 기분은 정말이지 처음이었어요. 충실히 자기 몫을 다하며 하루를 살아낸 사람들이 집으로 돌아오는 시간인데 나는 이제 일어나 어둠을 맞이하고 있구나. 그런 기분이 드는 겁니다. 당시 저는 편의점 야간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었어요. 남들이 자는 시간에 일을 했는데도 왜 그런 기분이 들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내가 주류에 속하지 않는다는 느낌을 내심 좋아해 왔으면서도 그날만은 아주 평균의 인간이고 싶었나 봅니다.


이후로 저는 아침에 출근하는 일을 구해 살고 있습니다. '오늘은 월요일이군.' '오늘은 화요일이야.' '아직 수요일이네.' 하면서 이전보다 선명하게 하루하루를 인식하며 적당히 바쁘게 지냅니다. 한 주에 한 번씩 기타 레슨도 받고 한 달에 한 곡씩 노래도 만들면서 제 속도로 일상을 보내고 있어요. 오늘은 퇴근길에 떠오른 문장들을 핸드폰 메모장에 적었습니다. 나만 이해할 것 같은 문장이네요. 그래도 노래로 만들어보려 합니다.






당신은 버스 기사고 매일 시를 쓰지요. 당신의 개, 아니 당신 아내의 개를 매일 밤 산책 시키다 펍에 들러 미지근한 맥주를 마시는 걸 알고 있어요. 근래에 겪은 가장 큰 사건이라고는 당신이 운전하는 버스가 길에서 퍼져버린 일 정도겠지요. 그 무난해 보이는 일상은 당신의 표정과 닮았어요. 늘 같아 보이지만 조금씩 다르고, 그 '조금 다름'이 당신에겐 커다란 발견으로 다가올 테죠. 그 발견이 주는 힘으로 매일 시를 쓰는 것이리라 예상하고 있어요. 당신이 쓰는 시가, 당신을 매일 새롭게 만든다는 걸 알아요. 그걸 온전히 느낄 수 있는 사람은 당신뿐이라는 것도.


언젠가 어떤 라디오 진행자가 '일상의 천재'라는 표현을 사용했을 때. 오! 하고 감탄을 했습니다. 보통 '천재'라고 하면 한 분야에 특출난 능력을 가진 바람에, 일상에는 매우 서툰 사람을 떠올리잖아요. 그런데 '일상'이라는 단어와 '천재'라는 단어가 그렇게 만날 수도 있다는 게 신기했어요. 매일을 좋은 균형으로 살아가는 것, 그러니까 한 분야에 뛰어난 게 아니라 삶 전반을 두루 잘 돌보는 것. 그것도 천재 같은 능력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게 해준 표현이었습니다. 그때 처음으로 천재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했어요. 주변에 휘둘리지 않고 나의 삶을 정성껏 돌보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요. 그러자 그 누구보다 '일상의 천재'인 P. 당신이 떠올랐어요.

내가 당신을 닮고 싶어 한다는 것이 다행으로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생각지 못한 아름다움을 발견한 날, 그게 너무 아무것도 아니어서 다른 이와 나누기는 민망할 때 저는 글을 씁니다. 그림도 막 그리고 노래도 합니다. 어떤 날엔 그냥 춤을 춰요. 당신이 시를 쓰는 것처럼. 춤, 노래, 글, 그림. 제 삶의 모든 무용한 것들이 '시'입니다. 이 시들은 하나도 중요하지 않으면서 무엇보다 소중합니다.


화가 날 때도 그렇게 합니다. 나만 아는 고통, 나만 느끼는 외로운 분노를 마주할 때, 저는 눈을 크게 뜹니다. 그리고 아름다움을 마주하는 것처럼 아픔도 마주합니다. 그러다 무슨 말인지 모를 엉망인 글을 마구마구 써 내려가요. 그러면 마음속에 작은 구멍이 나고 그리로 사납게 쌓여있던 무언가가 졸졸졸 빠져나갑니다.


P. 누군가 당신의 삶을 심심한 듯 소소한 일상이라 말하는 걸 들었어요. 제가 봤을 때 당신은 전혀 심심하지도 않고 소소하게 살고 있는 것도 아닌데 말이에요. 오히려 그 반대죠. 하루에도 몇 번씩 당신에게만 들려오는 이야기들과 발견되는 의미들로 심심할 틈이 없을 테죠. 같은 길을 매일 걸어도 계절마다. 날씨마다의 변화를 느낄 거예요. 왠지 기분에 따라 다르게 느껴지는 맥주 맛을 음미하고 당신의 버스에서 나누는 승객들의 대화를 듣는 것이 아주 재미있을 거예요. 그리고 그 모든 일상이 시가 되어 당신의 노트에 쓰이겠죠. 이만큼 충만하고 재미있는 삶이 있을까요.






꿈은 하룻밤에 하나면 충분한 것 같아요. 아애 없으면 더 좋죠. 꿈보다 숙면이 더 중요해요. P. 요즘 저의 삶은 당신과 대충 비슷해진 것도 같습니다. 그게 잘 안되는 것 같은 순간이 와도 너무 애쓰진 않을게요. 자연스러운 인간이 되고 싶거든요. 언젠가 제가 진짜 시를 쓰게 되는 날이 오면 당신이 자주 가는 폭포 앞 벤치에 노트를 들고 찾아갈게요. 힌트를 줘서 고마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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