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콰도르 키토] 4700m의 루꾸 피친차에 올라 악천후를 만나다
Lucu Pichinnha,
루꾸 피친차 - 키토에 위치한 활화산 봉우리다.
며칠 전부터 피친차 산의 전망대 텔레페리코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나눴는데, 어쩌다보니 프레드가 우리의 가이드가 되어 피친차 산에 가기로 되어버렸다. 정상에 가면 큰 분화구가 있는데 그 위를 독수리들이 빙빙 날아다닌단다. 페루로 이동해서 마추픽추와 와이나픽추, 비니쿤카에나 가서 등산을 하게 되겠구나 생각했는데 난데없이 에콰도르에서 등산이라니? 그래도 케이블카를 타고 간다니 나들이라고 생각하고 가면 되겠군, 싶다.
물이랑 초콜렛이 좀 필요할 거야.
슈퍼에 들러 500ml 물을 집어들었더니 프레드가 찡긋, 한다.
Hannah, 너 그거 너무 적어. 1L짜리 사.
왜? 산에 가는데 무겁잖아.
아냐, 너 내 말듣는게 좋을걸. 우리 많이 걸어야 해
사라니 사고 봐야지.
나중에 무거워서 힘들면 니가 들어줘, 흘깃 째려보며 한 마디를 덧붙여 본다.
15분 가량 케이블카를 타고 올라가 텔레페리코에 내리면 탁 트인 키토 전경을 볼 수 있다.
그리고 뒤를 돌아보면...
우리가 가야 할 엄청난 길과 함께 루꾸 피친차가 구름 위에 떠 있는 듯 신비한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프레드, 우리 전망대 왔다 가는거 아니었어? 물으니 씩 웃으며 루꾸 피친차를 가리킨다. 너 그래서 우리한테 등산화 신고 물 1L 사라고 했구나. 이제야 알아채는 지수와 나였다. 텔레페리코는 해발 4000m에 위치 해 있고 루꾸 피친차는 4700m란다. 그래, 700m쯤이야 까짓거 한 번 가보지 뭐. 라며 고! 렛츠 고! 를 외쳤던 과거의 나를 매우 쳤어야 한다.
트래킹, 아니다. 클라이밍이라고 부르는게 더 적합 할 것 같다. 안그래도 고산지대라 숨 한 번 쉬는게 어렵게 느껴졌는데 왜 죄다 오르막에, 심지어는 맨손으로 암벽등반 해야하는 곳만 잔뜩인건지. 솔직하게 말하자면 중간에 포기하고 여기서 가만히 기다릴테니 프레드 너 혼자 다녀와~ 라고 말하려고 했다. 지수도 '언니 나 정말 못가겠어. 그만 가고 싶어' 라고 눈빛을 보내고 있었지만 거기까지 꾸역꾸역 올라온 게 아까워서 그만 가겠다고도 못했다.
괜찮아, 이제 4퍼센트 남았어
넌 할 수 있다고, 몇 퍼센트 남았다며 붙잡고 끌고 올라가 준 프레드 덕분에 겨우 겨우 한 발짝 씩 내딛었다. 세 발자국에 심호흡 한 번, 그리고 다시 네 발자국.
고마워-
그런데 이 고생도 다 네 덕이야 프레드. 그리고 아까부터 왜 자꾸 4퍼센트에서 변하질 않는건데?
흙길에서 돌무더기가 가득한 길로 바뀌어 갈 때 쯤, 드디어 제대로 된 휴식을 가졌다. 수분과 당 보충에는 이게 최고야, 라며 프레드가 쥐어준 포도를 동앗줄이라도 되는 마냥 소중하게 품에 안았다. 복서에 스프린터인 그에게는 쬐그만 동양 여자애 둘이 쓸모없고 무거운 짐처럼 느껴질 만도 한데, 우리 둘의 짐까지 대신 들어주며 이끌어 주는 프레드가 너무 고마웠다.
그런데 발이 푹푹 빠지는 모래언덕을 걷던 도중 우박이 내리는 황당한 상황이 벌어졌다. 한 손에는 우산을 들었지, 발은 뒤로 빠지지, 숨은 차지, 손은 시렵지. 하지만 그 후 겪은 일을 생각 해 보면 정말 아무것도 아니었다. 맨손으로 클라이밍을 했어야 하니 말이다. 눈물이 핑 돌고 엉엉 울고싶었는데, 누가 나를 업어다 정상에 올려줄 수도 산 입구에 내려다 놔 줄 수도 없는 노릇이라 무작정 다음에 디딜 곳만 보고 암벽을 올랐다. 프레드는 계속해서 적당한 디딤바위를 찾아서 길을 개척 해 주었다. 너무 고마운 사람이지만 가도 가도 여전히 4퍼센트만 남았다고 해서 한 대 때릴 뻔 했다.
우리 여기서 죽진 말자
그러니까 발 조심해. 집중해야된다구.
정상이 있긴 있더라. 감격스러워서 다 같이 얼싸안으며 잘했다고, 고생했다고, 고맙다고 안아주었다. 날씨가 좋을 때는 화산 분화구도 보이고, 독수리들이 사람들 머리 위를 날아다니는 모습을 볼 수 있다고 했지만 오늘은 온통 안개뿐이었다. 그래도 상관 없었다. 이제 내려가기만 하면 된다는 기쁨이 더 컸으니까.
정상에는 우리 셋과 영국인 커플 그리고 에콰도르인 커플 일곱명뿐이라 다 함께 간식거리를 나누어 먹었다. 마음씨 좋은 영국인 커플 덕에 따뜻한 쇼콜라떼도 얻어마셨다.
내려오는 길엔 폭우가 쏟아졌다.
비가 뚝뚝 떨어지기 시작하더니 폭우로 바뀌어 온몸이 푹 젖어버렸다. 오줌이 마렵다며 잠깐 기다려달라는 프레드의 말에 바위 아래에 서 있는데 실소가 터져나왔다. 여기는 어디고 나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 나와 지수는 비가 약해질 때 까지 조금 쉬었다 가는게 어떠냐는 의견을 냈지만, 프레드는 더 이상 지체하면 안되겠다고 생각했는지 양손에 나와 지수의 손을 하나씩 잡고 뛰기 시작했다.
발가락은 앞으로 쏠려서 아프고, 숨은 차고, 추워서 몽롱한데 눈앞은 흐리고 정말이지 재난 영화 속의 한 장면이었다. 들판에 뛰어다니는 산토끼도 예뻐해 줄 겨를이 없었다.
텔레페리코를 향해 돌격 앞으로!
케이블 카에 앉은 셋은 아무 말이 없었다.
함께 탄 에콰도르 여자애가 너희 정말 푹 젖었구나. 라고 어색한 영어로 건넨 말이 차가운 공기를 휘감았다. 우리가 무사히 하산해서 사람을 만나다니! 그것도 하나도 젖지 않은 멀쩡한 사람을! 이 모든 상황이 황당하고 어이가 없었지만 또 감사했다.
푹 젖어 더이상 걸을 힘도 없이 호스텔에 도착한 우리를, 루까할배와 폴이 훌쩍 들어 안아주었다. 너희 정말 이 날씨에 정상에 갔다온거야? 미쳤어 말도 안돼. 너희 진짜 대단해. 고생했어.
씻고 그냥 자고싶었는데, 루까할배가 저녁을 해두었으니 올라오란다. 주키니 호박에 고기를 채워넣어 찐 요리를 몇 조각 먹었다. 그는 몸을 좀 녹이라며 차이티도 내어주었다. 늦은 저녁을 먹은 후 새까맣게 피멍이 든 발톱들과 빨갛게 벗겨진 살에 연고를 발라주며 위로의 손길을 건네 본다.
니들도 고생 많았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