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을 찾다가 나를 찾게 된 사연.
타향살이를 하는 사람들에게는 각기 다른 고향의 모습이 있을 것이다.
나는 내 고향 부산을 떠올리면 집 한 채가 그려진다. 골목 사이에 아담하게 자리한 3층의 주택인데 그 집의 1층은 작은 상가로 세를 주어서 어느 때는 꽃집이기도 하고, 사무실이기도 했다가, 지금은 정육점이 되었다. 3층 위에 있는 작은 옥상의 울타리를 빙 두른 화분과 때 되면 빨갛게 무르익던 고추와 2층과 3층을 잇던 계단을 내달려 뛰어가던 어린 시절의 내 모습이 있는 그곳은, 우리 외할머니가 만든 집이다. 3층엔 외할머니와 이모가 지내시고 2층엔 우리 가족이 살았다.
나는 그 집이 정말 좋았다. 계단으로 쭉 이어지는 집은 마치 미로 같아 재미있었다. 내 방에서 베란다로 이어지는 창문을 의자 삼아 앉아서 집으로 돌아오는 엄마를 지켜보는 것도 즐거웠다. 무엇보다 좋았던 것은 그 집에서 보낸 시간들이다. 그 속에서 나는 온전한 애정과 안전한 결속을 느끼며 자랐다. 아주 감사한 날들이었다.
그 울타리를 나오는 순간부터 나는 궁금한 게 많아졌다. 최초의 질문은 부동산에 가서 나는 어떤 집에 살 수 있는지, 이 서울에서 내가 감당할 수 있는 자리가 도대체 어디인지 묻는 것부터였다. 알아야 할 것도 태산이었는데 500에 50, 전용면적, 반전세 같은 알쏭달쏭한 단어들과 7천, 1억, 3억, 억, 억하는 액수는 좀처럼 쉽게 익숙해지지 않았다. 그나마 다행이라고 할 수 있었던 것은 나의 재정적 조건이 한정적이라 선택지도 대폭 줄어들었다는 것이다. 그렇게 시작된 서울 원룸 탐방은 또 다른 놀라움이었다.
‘정말 이런 집을 사람이 살라고 내놓으신 겁니까? ’
‘이곳에 이 가격이 최선입니까? ’
‘세상에 이런 집이? ’
하고 속으로 외치게 되는 곳들이 수두룩했다.
어느 날은 망원역 근처에 음악 작업이 가능한 집이 있다고 해서 방문했다. 현관문을 열자마자 화장실바닥 같이 깔린 타일의 한 계단 위로 작은 방이 있었다. 입구의 타일이 있는 곳은 방 길이만큼 가로로 이어져서 옆에는 세면대가 있었는데 그 구조자체도 특이했지만 아무리 봐도 변기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주인에게 물어보니 방 안에는 변기가 없고 외부에 공용 변기가 하나 있으며, 필요하면 캠핑용 변기를 놔주겠다고 하셨다.
캠핑용 변기라니. 그게 뭐냐고 물어보자 주인이 직접 휴대폰으로 검색을 해서 설명을 해주셨다. 지나고 보니 화장실 사용이 어려운 곳에서 캠핑을 하시는 분들에겐 아주 유용하게 사용되는 물건이었지만 그와 초면이었던 당시의 나에겐 충격이었다. 서울에서 집을 찾다 보면 이런 재미있는 곳들이 있다. 화장실이 있는 집에 감사하게 되는.
내 이삿짐에는 5인치 스피커와 야마하 81 건반, 통기타, 세미할로우 일렉기타가 항상 함께한다. 보통은 작업실과 집을 따로 구하지만 작업실은 또 한 달 월세 값이라 부담스럽기도 하고 내가 하는 작업들이 아주 큰 소음을 내는 건 아니라 어느 정도 방음이 되고 집주인의 동의가 있다면 집에서도 가능하다. 그래서 내가 구하는 집의 조건은 이랬다.
✓ 음악 작업이 가능한 곳
✓ 작업공간과 생활공간이 분리 가능한 곳
그러다 보니 자연히 투룸이나 복층의 구조를 가진 집을 찾게 되었는데 인터넷으로 집을 알아볼 때, 다른 구조보다도 유독 복층은 ‘예쁜 복층 구해요.’ 같은 수요의 글도 있고, ‘복층의 로망을 실현하세요’라는 선전문구도 흔했다. 그런 제목을 볼 때마다 나는, '로망은 없지만 한번 구경하겠습니다.' 하며 클릭했다. 그렇게 서울에서 구한 4번의 집 중에 2번을 복층에서 살다 보니 주변사람들은 으레 나를 복층의 로망을 실현한 자로 분류해 버렸다. 물론 이젠 완고하게 아니라고 하기에는 복층의 단점을 느낄 새 없이 잘 지냈지만, 처음부터 로망은 없었다니깐.
그동안 나에게는 ‘어떤 집을 구할 것인가’보다 ‘어떤 집을 구할 수 있는가’가 더 중요한 문제였다. 조금 마음에 들지 않아도 ‘이 정도면 괜찮지’ 또는 ‘안 괜찮으면 어때.’ 했다. 그러나 그런 안일함으로 여러 번의 이사를 경험하면서 나는 집이라는 공간의 중요성을 절실히 깨달았다. 특히 많은 시간을 집에서 작업하는 나에겐 내가 그 공간을 얼마나 사랑할 수 있는지가 중요했다. 그걸 아는 사람은 나 밖에 없었으니, 결국 집을 찾을 때 하던 무수한 질문들이 나에게로 돌아왔다. 나는 어떤 것을 포기할 수 있고 어떤 것은 꼭 있어야 하는지, 나의 로망은 무엇인지 같은 질문으로.
나는 걷는 걸 좋아하니까 주변에 공원이 있거나 걸을만한 길이 있는 집을 한번 찾아볼까. 그런 걸 공세권이라고 한다지. 그리고 옥상을 이용할 수 있거나 큰 창이 있는 곳으로 가자. 집 안이 작아도 집안에서 보이는 풍경이 넓으면 그 풍경까지 우리 집이 될 테니까. 친구들의 집과 가까운 곳이면 좋겠다. 친구가 나를 필요로 할 때나 내가 친구가 필요할 때에 금방 갈 수 있을 테니까.
이처럼 3번의 이사와 어쩔 수없이 선택한 복층이라는 가짜 로망을 지내고 나서야 나는 드디어 진짜 내가 살고 싶은 집과 나에 대해 찾아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집은 어쩐지 외할머니와 함께 지냈던 그 집을 닮았다. 마치 태어난 둥지에서 나온 새가 어설프게 자신만의 둥지를 짓는 것처럼 나의 집에 대한 로망도 내 방식으로
차곡차곡 쌓아질 것이다. 투 비 컨티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