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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에게 아이들이 바라는 한 가지

현실에 꿈을 맞추는 아이들

 학교에 다니던 시절을 떠올리면 대표적인 몇 가지 사건들과 몇 분의 선생님이 생각난다.

 재미있는 것은 사회에 나와서 내가 하는 일보다 내가 맺은 관계에서 더 많은 의미를 얻듯이 학교에서 역시 학교에서 얻은 지식보다는 학교에서 맺은 친구와 선생님과의 관계에서 더 많은 의미를 얻었다는 점이다. 오늘은 학교에서 만난 세 분의 선생님에 대한 이야기를 해볼까 한다.

 나에게는 크게 '분노'의 감정을 가르쳐준 선생님, '연민'의 감정을 가르쳐준 선생님, 그리고 '따뜻한 배려'의 감정을 가르쳐준 선생님이 계시다. EBS 강사를 하셨던 강의를 잘하는 유명한 수학 선생님이 계셨지만 그 선생님은 잘 기억나지 않는다. 수업내용도 포함해서 말이다.


 초등학교 시절을 떠올리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사건이 있다. 본래 강렬한 영상은 대체로 충격적이거나 강한 감정적 동요를 느꼈을 때 마음속에 새겨진다. 그 선생님의 얼굴과 표정이 생생하게 기억이 난다.

 6학년 때였다. 급식소에서 안전 교육을 받기 위해 전 학년의 아이들이 모였다. 아이들은 공부를 하지 않고 급식소에 모이게 된 것이 마냥 신이 다. 칠판을 바라봐야 하는 구도가 아니라 마주 보고 앉았기에 서로에게 눈빛을 주고받으며 장난을 치고 싶었다. 그런데 무섭기로 유명한 5반 선생님이 떠들지 말라고 경고했고, 우리는 조용했다. 그런데 그 순간 앞의 친구와 눈이 마주쳐 웃음이 터지고 말았다. 종종 아이들은 눈만 마주쳐도 박장대소가 터지곤 한다. 아드레날린이 과다 분출되어 그렇다.


  선생님은 나의 머리를 출석부로 세게 내리쳤는데 위에서 아래로 내리친 게 아니라 오른쪽 사선에서 왼쪽 사선으로 내리쳤다. 나를 날렸다는 표현이 맞는 것 같다. 나는 의자에서 넘어졌고, 머리에 하고 있던 머리띠가 저 멀리로 날아갔다. 머리띠에 촘촘히 나 있는 빗들이 두피에 박힌 것처럼 아팠다. 이 모든 장면들이 생생히 기억난다. 나는 그 머리띠를 주우려고 손을 뻗었는데 넘어진 충격으로 머리띠를 제대로 잡을 수 없었다. 손을 뻗어 머리띠를 잡으려고 했는데 머리가 어지러워 제대로 잡지 못했다. 몇 번의 시도 끝에 머리띠를 잡았고 일어나 앉았다. 많은 친구들 앞에서 수치심을 느꼈다. 나는 처음으로 내 안의 강력한 분노를 느꼈다. 그리고 사람은 극도의 분노를 느끼면 오히려 차분해진다. 나는 차분하게 그 선생님의 반으로 가서 평소 그 선생님이 아끼며 키우는 화분에서 분재나무를 뽑아버렸다. 선생님이 공을 들여 정성껏 키우는 소나무 분재였다. 나는 그렇게 당돌하게 누군가에게 복수를 할 수 있는 성격이 아니었음에도 그 행동을 함에 있어서 망설임이 없었다. 그리고 선생님의 화분을 망가뜨리는 것만으로 분노가 가시지 않았다.

 나중에 선생님이 나를 불러 눈알을 부라리며 말했다.

"네가 열 받아서 화분 뽑은 거지?"

나는 태연하게 말했다.

"아니요, 제가 그런 것 아닌데요."

"네가 한 게 아니라고? 내가 증거를 찾아서 꼭 누가 그랬는지 찾아내고 말 거야! 각오해!"

 나는 두려움을 느끼지 않았고, 죄책감도 느끼지 않았다. 내가 '화'라는 표현이 아닌, '분노'라는 표현을 쓰는 것은 그때 느낀 강렬한 감정이 '화'라는 설명만으로는 충분히 설명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나는 진심으로 분노했고 그때의 감정과 그 선생님의 표정을 생생히 기억한다.


 두 번째는 고등학교 선생님이다. 그 선생님은 나에게 '연민'의 감정을 가르쳐 주셨다. 누군가가 나를 불쌍하게 바라보는 것이 어떤 기분을 일으키는지 알게 해 주셨다. 고등학교에 재학할 당시 우리 가정의 경제적 형편은 참담한 수준이었다. 부모님은 이혼을 하셨고, 엄마는 한 푼의 돈도 없는 상태로 제주도를 떠나 경기도 수원시로 나를 데리고 이사를 왔다. 멀디 먼 친척의 집에 얹혀 단칸방에서 우리의 삶을 새로 시작했을 때 전학을 가서 새롭게 만난 선생님은 나를 많이 챙겨주셨다. 선생님은 늘 안쓰러운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는데 나는 그 눈빛이 처음에는 부담스러웠다. '왜 저렇게 나를 보실까?' 애처롭게 나를 바라보며 나에게 묻곤 하셨다.

"그 목도리는 아빠가 주신 것이라서 가지고 다니는 거니?"

나는 목도리가 하나밖에 없어서 그 목도리를 늘 두르고 다녔는데, 선생님이 보시기에는 아빠를 그리워하는 내가 안쓰러워 보이셨던 것이다. 선생님의 질문에 어쩔 수 없이 "네"라고 답했다. 선생님은 그때부터 더욱 나를 애처롭게 보시며 이것저것 챙겨주셨다.


 우리 집이 경제적으로 힘든 상황이었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학교에서 먹는 급식을 비롯해 여러 가지 경제적 보조를 받고 있다는 것을 나는 몰랐다. 나는 내가 돈을 내고 급식을 먹는 줄 알았다. 그리고 돈을 내고 학교를 다니는 줄 알았다. 그러나 나중에 친구를 통해 알게 된 사실이었는데 나는 돈을 내지 않고 학교를 다니고 급식을 먹는 지원 대상자였다. 한 반에 얼마 없는 소수의 지원 대상자 중 하나. 그리고 그로 인해 늘 선생님의 연민 가득한 눈빛을 받아야 했다. 나는 그 당시 가난이 슬프지 않았고, 스스로를 불쌍히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선생님의 그 눈빛을 보며 내가 불쌍한 존재라는 것을 깨달았다. 나는 선생님으로부터 겨울 코트도 얻어 입었고, 문제집도 받아서 풀었다. 나는 선생님께서 나를 불쌍히 여기고 연민의 감정을 느끼며 베푸는 다양한 혜택을 그냥 수용했다. 크게 수치스럽지 않았고, 그냥 그게 편했다. 하지만 돌이켜 생각해보면 나는 내가 연민의 감정을 느낄 만큼 불행하지 않았다. 나는 행복했고 그냥 그 삶이 나쁘지 않았다.


 세 번째는 '따뜻한 배려'의 감정을 알려준 선생님, 중학교 때의 선생님이다. 나는 제주도에서 중학교를 나왔는데 그 중학교는 명문 중학교가 아니었다. 그 당시 제주도에서는 내가 사는 곳의 위치에 따라 중고등학교를 배정받는 시스템이었다. 좋은 학교를 선택할 수 있는 선택권이 없었다. 그런데 그 중학교의 위치상 저 멀리 시골에서 버스를 타고 학교를 다니는 친구들이 많았다. 그 친구들의 부모님들은 대체로 밭에서 일을 하거나 농장을 운영하시기에 아이들의 학습에 큰 신경을 써주지 못하는 분들이 많았고 그런 까닭에 아이들은 학습에 큰 흥미를 느끼거나 공부를 잘하지는 못했다.

 이 학교에서 따뜻한 배려의 감정을 알려주신 선생님은 자꾸만 장난을 치고 싶어 지는 그런 선생님이었다. 선생님은 아이들의 장난을 잘 받아주셨지만 할 말은 아낌없이 하시고 꾸짖을 때는 가감 없이 꾸짖으셨다. 그런데 그냥 내가 무슨 짓을 해도 받아주실 것 같은 따뜻한 배려를 느꼈다. 아이들을 성적으로 평가하거나 비교하지 않았고, 안경 너머의 따뜻한 눈빛으로 장난꾸러기인 우리들을 쳐다보셨다. 그냥 그 눈빛이 기억난다. 칭찬도 많이 하지 않으셨다. 하지만 선생님이 수업을 할 때 열의를 가지고 하고 있다는 것을 보았고, 그리고 모든 아이들을 배려하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선생님은 대충대충 하지 않았다. 그리고 우리를 귀찮아하지도 않으셨다. 나는 그 선생님이 좋았고 모든 아이들이 선생님을 잘 따랐다.

 아이들이 원하는 학교라는 공간은 어떤 곳일까?    

 학교란 나에게 학습을 하고 지식을 습득하는 공간이라기보다 그저 친구들을 만날 수 있는 곳, 부모님이 아닌 어른으로서의 선생님과 관계를 맺는 곳, 학사 일정과 주간 일정표에 따라 계획적인 삶의 방식과 문화를 배우는 곳이었다. 잘 가르쳐주시는 선생님을 만나 지적 호기심을 불러일으켰다면 어땠을까 생각해 보기도 하지만 잘 가르쳐주시는 선생님보다는 따뜻하고 배려 깊은 선생님, 우리를 따뜻한 눈으로 바라봐 주시는 선생님이 제일 좋았다.  나의 경험을 바탕으로 학교와 선생님의 의미를 돌이켜 생각해보면 학교는 친구들을 만나는 곳이고 선생님은 우리를 통솔해주시는 리더였다.


 어쩌면 나는 운이 좋았다. 강한 스트레스 상황에서 학습해야 하지 않았고, 그저 인간적인 선생님들을 경험했다. 대단한 지적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는 선생님은 없었지만, 사실 교과서를 중심으로 지식을 가르쳐주는 시스템의 학교에서 지극히 개인적인 학습의 맥락에서 발생되는 지적 호기심을 불러일으킨다는 것이 가능하긴 할까? 그런 생각을 해본다.


 아이들이 선생님에게 바라는 한 가지는 그저 믿음의 눈빛으로 나를 따뜻하게 대해주는 것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아이들에게 따뜻하게 대해주며 그들의 선택과 결정에 신뢰를 보이는 것. 그것만으로 충분했다. 학교라는 공간은 학습의 공간이 아니라 삶의 공간이다. 아이들은 그곳에서 사회를 배워간다. 사회에는 더럽고 추악한 모습, 선하고 따뜻한 다양한 모습이 있지만 아이들이 먼저 배워야 할 것은 믿음, 신뢰, 이해, 사랑이라는 가치이다. 선생님들은 교과를 가르쳐야 하는 지식의 전달자이기에 앞서 아이들에게 정서적 지지와 신뢰, 이해와 공감을 가르쳐야 할 사랑의 전달자가 되어야 한다. 내가 중학교 때 겪었던 선생님처럼 말이다.


삶을 살면서 어떤 선생님의 이름은 세월이 지나도 잊혀지지 않는다. 아이들은 선생님의 진심을 누구보다 빨리, 정확하게 알아차린다. 아이들을 사랑으로 대해주는 그런 선생님들이 많아졌으면 하는 바람을 가져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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