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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물 수 있는 용기

아이에게 배우는 과정의 즐거움

 요즘 아이는 블록 만들기를 좋아한다. 블록을 만들 때에는 입술이 조금 앞으로 튀어나온다. 눈은 밑을 응시하고 허리는 구부정해진다. 아이는 열심히 무언가를 만든다. 그것을 만드는 동안은 아주 조용하다. 나 역시 아이를 방해하지 않고 아이가 블록으로 무언가를 열심히 만드는 모습을 지켜본다. 만들기를 완성하고 나면 아이의 쑥 나왔던 입이 다시 옆으로 퍼진다. 작아졌던 눈이 번쩍 뜨인다. 광대가 은근히 위로 올라가고 완성된 블록을 가지고 자리에서 일어나 얼마 간 놀이를 한다. 숫자 5를 만들었다고 좋아하기도 하고, 비행기를 만들었다며 나보고 타 보라고도 한다. 그리고는 그 블록을 미련 없이 부순다. 집에 블록이 그리 많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매일 블록 놀이를 할 수 있는 것은 아이가 블록 만들기의 결과물에 집착하지 않기 때문이다. 만약 블록 만들기의 결과물에 집착을 했다면 우리 집은 블록 전시장이 될지도 모른다. 다행히 모든 놀이가 끝나면 블록은 해체되어 낱개로 장난감 상자 안에 들어간다. 미련이 남아서 블록을 부수지 못하는 것은 오히려 엄마인 나이다. 아이에게는 그 어떤 미련도 없다.


 모래 놀이를 할 때도 그렇다. 정성스럽게 모래성을 쌓고서는 한 순간에 그 모래성을 무너뜨리기도 한다. 긴 시간 정성을 들여서 만든 모래성을 집으로 가져가고 싶다고 하기라도 한다면 굉장히 난감할 텐데 그런 일은 없다. 모래로 밥도 만들고, 떡도 만들고 집도 만든다. 그리고 밥과 떡을 먹는 시늉도 해 보고, 집을 드나드는 놀이를 한다. 그리고는 모래성을 한방에 무너뜨린다. 옆에서 보는 나는 '헉'하고 놀란다. 모래로 만든 것을 무너뜨리고 울음이라도 터뜨릴까봐 조마조마하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금세 모래로 다른 것을 만들기 시작한다. 아이들은 자기가 만든 결과물에 집착하지 않는다. 충분히 과정을 즐기고 결과물을 즐기다가 그것을 버릴 줄 안다. 다시 무너뜨리고 엎어버릴 줄 안다.

모래 놀이 (출처 : Pixabay)

 아이들은 무언가 자기가 세운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 노력을 기울이는 과정 그 자체에서 즐거움을 느낀다. 이때의 목표란 자기가 생각하는 무언가를 만들고 싶다는 지극히 사소하고 개인적인 성격을 갖는다. 어떤 외부의 목적이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수단으로 이 활동을 하는 것이 아니다. 그렇게 자기 목적성이 강한 놀이를 하면서 아이들은 과정 자체에서 즐거움을 느낀다. 그렇기에 결과물에 집착을 할 필요가 없다. 그 과정에 다시 들어가고 싶다면 부수고 새롭게 시작을 하면 되기 때문이다. 다만 다른 사람의 방해로 인해 자기가 만들려고 했던 무언가에 문제가 생긴다면 좌절을 느낀다. 스스로 통제할 수 없는 상황에 대한 좌절이다. 하지만 이 좌절 또한 금방 잊곤 한다.


 생각해 보았다. 아이들이 순수하게 무언가에 몰입을 하고 즐거움을 느끼는 과정에 대해서 말이다. 어른이 된 지금 어릴 때 느꼈던 흥미와 즐거움을 따라갈 만큼 강렬한 자극은 별로 없다. 사실 강렬한 자극이 없기 때문이 아니라, 어떤 놀이나 일을 대할 때 그만큼 과정에 주의를 기울이고 몰입하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말이 더욱 정확하다. 어떤 일을 할 때 결과물에 집착을 하게 되고, 그 결과물을 모으는 행위가 중요해지면 과정에서 얻는 즐거움의 크기가 줄어든다. 결과물을 전시해놓고 그 결과물을 감상하는 기쁨에 빠져 있다면, 계속해서 무언가에 도전하고 나에게 즐거움을 주는 경험을 계속하기가 어렵다.

 글을 쓸 때에도 그림을 그릴 때에도 마찬가지이다. 내가 쓴 글, 내가 그린 그림을 수집해놓고 그것을 바라보는 것에서 즐거움을 느낀다면 그다음 작품을 만들기가 어려워진다. 과감하게 내가 쓴 글을 무너뜨리고 내가 그린 그림들을 창고로 보내버렸을 때 그다음 작품에 몰입하고, 그 작품이 주는 도전감을 온몸으로 느낄 수 있다. 마치 아이들이 레고를 만들고 부숴버리거나 모래성을 쌓고 기꺼이 다른 곳으로 자리를 옮기는 것처럼 말이다. 애정과 주의를 기울여서 작품을 만들어 놓고, 그것에 미련을 두지 않고 떠날 수 있는 것은 더 큰 애정과 더 큰 도전이 되는 다음 과제로 나의 주의와 집중을 옮겨가는 중요한 발판이 된다. 


 붙들고 놓지 못하는 많은 것들이 있다. 내가 그동안 잘했던 성과, 화려하게 빛이 났던 시기, 박수를 받던 그 순간. 이와 같은 성과나 시기, 순간에 집중을 하게 되면 더 큰 도전에 뛰어들 수 없고 도전에 임하는 과정에서의 즐거움은 사라질 수밖에 없다. '박수 칠 때 떠나라'라는 말은 다른 말로 말하면 나의 성과나 빛이 나는 순간을 과감하게 버리고 그다음의 도전 과정을 즐길 준비를 하라는 말로 들린다. 그런 자세만이 우리에게 꾸준한 즐거움을 줄 수 있을 테니까 말이다. 

 결과에 집착을 하는 마음, 조급하게 그것을 이루려는 마음만 없앤다면 삶이 가진 모든 재료는 그 재료에 집중을 하는 것만으로도 우리에게 즐거움을 줄 수 있다. 결과물에 집중하지 않고 내가 생각한 무엇인가를 이루어 나가는 과정에 집중을 한다면 말이다. 쉬운 말처럼 들리지만 내가 쌓은 모래성과 내가 만든 블록 결과물을 부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은 아니다. 하지만 그 결과물에 비해 좋아하는 것을 몰입해서 해 나가는 과정이 주는 즐거움이 더 크다는 것을 아이들은 잘 안다. 즐거움 자체가 목적이기 때문이다. 그 결과물에 집착을 했을 때, 더 이상 다른 즐거움을 찾을 수 없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알아차린다. 그런 면에서 아이들은 매우 현명하다. 

 그렇다고 내가 지금까지 쓴 글들을 모두 쓰레기통에 가져다가 버린다거나, 내가 그린 그림들을 모두 창고에 넣고 문을 잠가버리라는 의미가 아니다. 그것들은 잘 관리되고 보관되어야 함이 마땅하다. 다만 그 작품이나 결과물을 내 활동의 최종 목적지로 삼는다면 그 과정에서의 즐거움을 찾을 수 없기 때문에 과정 자체를 즐기기 위해 작품이나 결과물에 대한 조급한 압박을 버릴 필요가 있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어른이 되고 난 뒤, 우리는 즐거운 삶을 원하면서도 즐겁게 살아가지 못한다. 일의 결과를 미리 예측하거나, 그 일이 나에게 가져다 줄 부수적인 것들에 너무 집중을 하거나, 그 일이 가져다 줄 결과에 너무 몰입을 하기 때문은 아닐까? 내가 만약 그 일을 좋아한다면 그 일을 행하는 과정, 그 과정에 주의를 기울이고 깊이 빠져드는 그 즐거움만으로도 우리는 충분히 많은 즐거움을 누릴 수 있는 게 아닐까? 공들여 만든 작품을 허물 수 있는 용기. 새롭게 더 멋진 무언가를 만들 수 있다는 용기이다. 그런 용기를 통해서 더 큰 도전과 더 큰 즐거움을 만날 수 있을 거라고 아이가 노는 모습을 바라보며 오늘도 나는 아이에게 배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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