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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씩씩한 스텔라 Nov 16. 2024

아빠랑 만나지도 않으면서 양육비를 받으려고 했어?

가장 좋은 복수 방법은 상대방처럼 되지 않는 것이다. 마르쿠스아우렐리우스

24.10.29. 화

"오늘은 고령의 할아버지를 먼저 수술하기로 했습니다. 환자분은 두 번째로 들어가실 거예요. 오후 2시쯤으로 예상하시면 됩니다. 물론 앞의 수술이 빨리 끝나면 더 일찍 들어가실 수도 있고요"


아침에 회진을 오신 수술 주치의 신경외과 교수님이 오늘이 정말로 수술하는 날임을 상기시켜 주셨다.

보호자로 등록된 조카의 핸드폰으로 수술이 시작되면 문자가 발송되고 수술이 끝나고 중환자실로 이송되면

문자가 갈 거라고 했다. 나만큼 긴장한 28살 조카의 얼굴이 긴장으로 굳어졌다. 20대 어린 조카는 이모가 아프다는 말에 보호자로 간병인 역할을 하기로 했다.  나의 28살과는 비교가 안될 정도로 속 깊고 철든 조카에게 한없이 고마울 뿐이었다.


오후 2시가 되었는데 아직 수술방에서 연락이 없다는 간호사의 전달이 있었다. 앞의 수술이 오래 걸리고 있다고 한다. 누군지도 모르지만 부디 수술이 잘 끝났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들었다.

뇌질환 환자들의 카페 가입 후 알게 된 사실이지만  수술 후 깨어나지 못하는 경우도 종종 있을 만큼 힘들고 위험한 수술이며  나 또한 바로 오늘 그 수술을 앞두고 있었다.


2시 30분쯤 간호사실에서 수술방에서 연락이 왔다며 이송을 시작하겠다고 했다. 누워서 바라보는 천장의 형광등이 빠르게 지나갔다.  같이 수술방 앞까지 따라온 조카가 밝은 모습으로 웃었다.


"괜찮아 이모. 잘될 거야. 한숨 푹 자"


수술방 대기실에서 침대는 멈췄다.



 곧바로 들어온 침대가 하나 더 있었는데 얼핏 고개를 돌려보니 옆에 수술환자는 중동여자로 보였다. 통역자가 대기실까지 따라왔다. 아랍어를 쓴다고 하면서 간호사의 질문을 통역해 줬다. 그 여자환자는 영어를 잘해서 수술실은 그 중동여자만 가도 된다며 통역자는 나갔다.


그 아랍어 여자환자는 갑상선암 수술 때문에 왔다고 한다.

얼핏 보니 얼굴이 진짜 엄청 이쁘다. 화장기 없이 수술을 앞둔 환자가 저렇게 예쁠 수가 있나 싶을 정도였다.

우리나라의 최고 중 하나인 병원까지 원정 와서 수술을 받는 걸 보면 본인의 나라에서 귀족이거나 연예인 일거 같았다. 나 또한 수술 앞두고 있는 처지라 스몰토크 하고 싶었는데 관뒀다.




갑자기 움직이는 침대.  드디어 수술방으로 들어갔다.


이름이 뭐예요?  -씩씩한 스텔라요-

어디 수술하시기로 했어요?  -오른쪽 뇌종양수술이요-


나의 대답이 끝나자

메케한 가스가 호스를 통해 목으로 넘어온다. 숨을 쉴수록 가슴이 답답하다. 마시기 싫지만 마셔야 한다.

그리고 기억이 없다.


24. 10. 30. 수

중환자실

알 수 없는 소음들이 들려온다.

움직이고 싶은데 몸이 제대로 움직여지지 않는다.

어리어리하게 불빛도 보이지만 선명하지 않다.


간호사의 목소리가 들렸다.


"환자분 이름이 뭐예요"

"스텔라요"  (내 이름은 왜 자꾸 물어보는 거지...)


"스텔라님 오늘이 며칠이에요? 12시 넘었어요"

머리가 복잡하다. 12시가 넘었다는 걸 보니 하루가 지났구나. 29 다음은 30이지

"10월 30일이요"


"여기가 어디예요?"

"병원이요"


자꾸 질문을 해대는 간호사의 말에  간신히 대답을 마치고 잠이 들었다.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간호사들이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이 환자 소변이 안 나오네. 이거 봐봐"

"환자분 소변 참지 마세요!"


안 그래도 화장실을 가고 싶었는데 몸이 움직이지 않아서 참고 있었던 차였다.


소변줄을 차고 있으니 참지 말라고 했다. 소변량 체크해야 한다고.

나는 내가 소변줄을 차고 있는지도 몰랐다. 다 큰 어른인데 누워서 소변을 봐야 한다는 게 생각만큼 쉽지 않아

입으로 "쉬~~~~" 소리를 냈다. 그게 효과가 있었는지 간호사들이 체크를 하는 거 같았다.


"몇 시예요?"

눈도 못 뜬 채로 간호사에게 물으니 아까 처음 질문을 했을 때가 새벽 2시였는데 지금은 5시라고  했다.

잠깐 같았는데 그사이에 3시간 텀이 있었다는 게 놀라웠다.


갑자기 심장이 누가 칼로 찌르듯이 아팠다. 찢어지는 고통이 느껴졌다.

간호사에게 심장이 너무 아프다고 약을 달라고 했다.

여전히 눈을 뜨지 못했지만 간호사의 분주함이 느껴졌다.


"환자분, 심장이 40까지 떨어져서 중환자실 담당 주치의 샘이 추가 약처방은 어려울 것 같다고 해요. 응급으로  심근경색 검사를 했는데 다행히 심근경색은 아니라고 하네요. 약이 독해서 힘드실 수도 있어요"


40으로 떨어졌다는 것이 1분에 40번만 뛰었다는 것인지. 갑자기 심근경색 검사는 뭔지 혼란스럽기만 하다.

그리고 다시 잠이 들었다.


24.10.31. 목 ~ 11.2. 토

일반병실로 내려왔다. 여전히 어지럽고 힘들었다.

죽이 나왔는데 숟가락 들기도 힘들었다. 그래도 한술 먹어보라며 밥뚜껑을 열고 반찬 뚜껑을 열어주는 조카가 무색할 정도로 입덧을 하듯 구토를 했다.

음식 냄새가 속을 뒤집어놨다.  계속되는 구토로 어지러움 억제제를 추가로 더 맞았다.

그나마 마실 수 있는 게 포카리스웨트였다.  매끼 때마다 음식 냄새를 맡으면 구토가 나왔다.

겨우 씹어서 삼킬 수 있는 건 사과뿐이었다.

계획대로 회복을 한다면 11.2. 토요일 퇴원이 목표였지만 구토가 심해서 퇴원이 11.4. 월요일로 연기되었다.

간호사가 뇌척수액을 빼내던 등의 실밥을 풀어야 한다고 하며 실밥을 풀면 걷는 연습을 하라고 했다.

그러나 일어나 앉는 것조차 힘들었다.


24.11.3. 일

음식 냄새에 입덧하듯 구토가 심한 것을 알아낸 조카가 30분 정도 음식을 식혀서 주었다. 그러니 먹을만했다.

4 숟갈을 떠서 먹었다. 포카리스웨트를 마시고 사과 몇 조각을 먹으니 기운이 나고 눈이 떠졌다.

겨우 먹을 수 있는 게 사과라는 말을 들은 큰언니가 사과를 사들고 병원으로 왔다. 휠체어를 타고 1층으로 내려가  얼굴을 보니 참 이뻤다.

"언니 참 이쁘네"

평소라면 절대 못했을 말들이 술술 나왔다. 

다시 주어진 삶에는 감사함과 사랑을 표현함에 인색함이 없기로 마음먹었다.  

그러나 어지러움증이 있는데 휠체어를 타고 1층을 내려갔다 온 게 화근이었는지  봉지를 반절을 채울 만큼 구토를 했다. 기절하듯 한참을 누워있다가 정신이 들었다.

걷는 연습을 하라는 간호사의 말이 생각나 조카랑 간신히 일어나 병실 복도로 나갔다.

창문 밖으로 롯데타워가 보였다. 다신 못 볼 줄 알았던 롯데타워가 아름답게 빛나고 있었다.

내가 살았구나. 살아냈구나. 결국 이겨냈구나.


24.11.4. 월

아직 어지러움증이 있었지만 퇴원 결정은 내려졌다.  충청도에서 수술동의서 써주러 왔던 둘째 언니가 퇴원수속을 밟으러 아침 일찍부터 미리 와있었다. 어제 밤늦게까지 장사했을 텐데 동생 퇴원하는 거 도와주러 잠도 못 자고 서울까지 운전해서 온 정성에 눈물이 났다. 어떻게 갚을까 이 감사함을... 아직 몸이 성치 못한 나를 부축여가며 퇴원하면서 발급받아야 하는 서류를 받고 병원비를 결제하고 언니가 알아본 사설 앰뷸런스를 타고 재활병원으로  내려와 다시 입원했다. 재활병원 입원수속도 역시 둘째 언니가 맡아서 해줬다. 병실까지는 들어올 수가 없어 입구에서 날 들여보내며 주머니 속 쌈짓돈을 꺼내 내 손에 쥐어준다.


"스텔라야 돈 없다고 먹고 싶은 거 참지 말고, 이걸로 사 먹어. 퇴원할 때도 언니가 다시 올게. "


성인용 보행기 하이워커 한 달 대여를 시작으로 나의 재활은  입원생활로 시작되었다.


아이들에게 수술 잘 받고 오겠다고 했는데 슬프게도 아이들 보는 것도 미뤄졌다.

그리고 며칠 만에 핸드폰을 켜봤다.


큰딸과 유책이의 문자가 있었다.


큰딸의 문자를 보아하니

엄마가 아픈 게 아빠 때문인 거 같아 아빠의 면접교섭이 너무 싫어서 나가기 싫다고 문자 보냈더니 아빠랑 만나지도 않으면서 양육비를 받으려고 했냐며 돈을 못주겠다고 했다고 내년에 중학교도 들어가야 하는데 어떡하냐는 문자에 억장이 무너졌다.


복부에 힘을 주거나 혈압이 올라가는 행동을 3주 동안 절대로 주의하라고 했는데 전남편의 행태에 화가 났다.


카톡으로 보낸 유책이의 문자도 나를 괴롭혔다.


"한 달에 2번은 너무 번거로워서 1번만 만나기로 했고 날짜는 3-4일 전에 애들이랑 협의해서 정하기로 했어"


면접교섭 한 달에 2번이 번거롭단다......


이혼소송 당시 변호사의 말이 생각났다.

"면접교섭을 끝까지 하는 유책배우자는 거의 없습니다. 대부분 몇 년 하다 말아요"


올해 이혼이 됐는데 올해가 채 다 가기도 전에 유책이는 벌써부터 10월 양육비를 보내지 않았고

양육비를 빌미로 아이들에게 자신의 입맛대로 면접교섭 이행을 강요하고 나에게는 1달에 1번만 보겠다고 통보했다.


여전히 세상 무서운지 모르는 유책이었다.


여전히 남아있는 두통과 어지러움에 핸드폰 문자를 누르는 게 힘들었지만

10월 양육비를 빨리 입금해 달라는 내용과

너의 협박에 아이들이 또 만나기 싫다고 하면 양육비로 엄마를 괴롭힐 거 같아서 너의 조건대로 면접교섭을 하겠다고 했을 뿐이라고 나에게 말했으며 면접교섭은 너의 권리가 아니라 아이들의 권리임을 다시 한번 상기시켜 줬다.


내가 뇌수술로 사투를 벌이는 동안

유책이는 10월 양육비를 보내지 않았고

엄마의 부재로 심리적으로 불안한 초등학생 아이들을 상대로 그런 행동을 한 유책이가 원망스러웠다.


유책이와 상간녀를 향한 복수심이 재활의지의 연료가 되었다.


하루도 허투루 쓰지 않고  1달 안에 몸을 회복하고 재활을 마치고 퇴원하기로 마음먹었다.

앞으로는 아이들과 최고로 가장 잘 사는 것이 내가 할 수 있는 복수라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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