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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살구 Feb 17. 2021

러브앤 피스 다자이

광주의 싸락눈 내리는 오후



생각의 뿌리, 그러니까 내면의 가장 깊고 근본적인 것들에 대한 이야기를 누구에게나 할 수 있는 것은 아닐테다. 과연 서스럼도 부끄럼도 없이 톨톨 홀가분히 이야기할 수 있는 친구가 몇이나 될까. 일일 손가락을 접어가며 세어본 적은 없지만, 내겐 그러한 친구가 못 해도 넷 다섯은 되는 거 같다. 이 글을 읽으며, 혹시 그 손가락에 나도 포함되려나- 생각한다면 당신이 맞을 것이다.



나는 굉장히 직관적이고 폐쇄적이라고 할 수 있는 고질적인 면이 있는 사람이다. 그런 내가 진득하니 한 가지 일을 오래 해내는 비법은 바로 최선을 다하지 않는 것. 적당히 마무리하는 것. 쉽게 말해 대충이다. 속력과 몰입력은 대단하지만 내구성은 잘 모르겠단 말이다. 앗 아쩌면 끔찍한 대량생산의 폐허가 낳은 괴물인 걸까 어쩐지 기분이 별로다. 어쨌든지 본론으로 돌아가서, 내면의 이야기, 뿌리의 잔털마저 낱낱이 보여낼 수 있을 거라는 친구가 또 하나 생겼다. 자랑인가 의아스럽다만, 맞다 자랑이다.



내가 꾸린 가족이 아니라 자동으로 꾸려진 가족이 주는 상실감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으로 하여, 대중적인 것이 얼마나 감흥 없는 빈 껍데기란 말이냐는 신랄한 비판까지. 나는 용서받지 못할 따가운 말을 그 아이에게 내던졌다. 가시가 도톨도톨 박힌 나의 말이 그 아이의 곱슬거린 머리칼 언저리에 박혔다. 동그랗게 꿈벅 거리는 눈 주변에 다닥다닥 박혔다.



그 아이는 내 이야기를 잠잠 듣더니 이내 자그마한 입술로 벙긋거리며 말을 이어갔다. 존중과 사랑은 동등하지 않는다는 소신 있는 말을 했다. 아무렴 그렇단마다 사랑이 존중이 아니라고 내 힘껏 말려있는 파마머리를 흔들며 동조해 줬다.



낯선 거리에 해가 한 줌 내려주더니, 곧이어 어색한 찬바람이 불어왔다. 어쭙잖은 추위가 도리어 우스웠다. 이거 도대체 무슨 날씨지 웃어버렸다. 그런데 나, 나도 모르는 사이 날씨의 영웅이 되어버렸는지 모르겠다. 날씨 예보에 따르면 광주 날씨는 제법 흐리다가 오후에는 높은 확률로 비가 내린다고 하더니, 정작 바깥의 날씨는 볕이 좋아 견딜만한 온도였다. 3시까진 먹구름만 서성일뿐 빗방울은 떨어질 생각도 없어 보였다.



4시 25분 기차를 타기 위해 3시 좀 넘어 카페에서 나왔다. 그러고보니 우산도 없는데 비가 오면 큰일이지 하며 어서 지하철역으로 뛰어들어 갔다. 노선이 단 하나인 단순한 광주 지하철에 몸을 실었다. 삼십분쯤 걸려 송정역에 도착했는데 날씨 예보가 아주 틀리진 않었다.



4시가 되자 정말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지하철에서 나와 지상으로 올라오니 밖은 어느새 비가 벅벅 나리고 있었다. 예상 밖의 비라 그런지 우산을 쓴 사람은 몇 없었다. 저 멀리서 우산 없는 아지매들이 머리 위로 손차양을 야무지게 만들어 뛰어다니고 있었다. 반면에 난 지하철에서 기차역까지 친절하게 이어진 지붕 덕에 비 한 방울 맞질 않았다.



송정역에서 오송역까지 한 시간 정도 걸리는데. 앞서 삼십분은 창문 밖으로 비가 날리더니만 공주역을 지나자 비가 똑 그쳤다. 그러고는 믿기 힘든 설경이 창문 밖으로 훠이훠이 퍼져있었다. 세상에 눈이 이렇게 내렸다니.



아랫동네의 포근하고 들큼한 봄기운을 슬쩍 마시려다가 퍼뜩 끼얹어진 윗동네 찬물에 눈이 번떡 뜨였다. 하하하 놀라움도 잠시지 나는 기꺼이 이 기고만장한 행운을 만끽하느라 어깨에 힘이 잔뜩 들어갔다. 광주에 있는 동안 비 한 방울 맞지 않았고, 오송역에 도착할즘 되자 눈구름 그치고 눈부신 해가 짱짱하단다. 알겠는가 나는 날씨의 영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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