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만 원 언더 저렴이 텔레의 위력
예전엔 악기를 사려면 낙원상가에 가는 게 당연했어요. 온라인 악기 사이트 같은게 아예 존재하지도 않았고, 소위 ‘마감’이라 부르는 만듦새나 목재 결 등등 구석구석 꼼꼼히 보고 골라야 눈탱이를 맞지 않으니까요. 그러나 참 고루한 말이긴 하지만, 세상이 달라졌습니다.
물류 상황이 좋아지고 노하우가 쌓이면서, 2000년 이후 생겨난 온라인 악기 판매 사이트는 낙원상가의 권력을 많은 부분 가져왔습니다. 기타 스트링이나 피크, 관리 용품과 케이블 정도 사는 게 고작이던 온라인 악기 판매 사이트는 이제 20~30만 원의 저가형 기타부터 200~300만 원을 훌쩍 넘기는 기타와 이펙터까지 구입하는 곳으로 변해있어요. 이젠 아예 온라인 악기 판매 사이트에서 PB(Private Brand) 악기를 기획해 팔기도 하니까요. 이번에 혹한 건 그 PB 브랜드 기타였습니다.
싸고 괜찮아 보이는 녀석이 있어!
10월 말쯤 친구 녀석이 이런 말과 함께 보낸 것은 ‘토만’(Thomann)이라는 악기 전문점의 온라인 쇼핑몰이었어요. 온라인 쇼핑몰은 ‘독일의 스쿨뮤직’ 같은 위치인지 몰라도 토만은 1950년도부터 악기들을 판매하고 자체적으로 만들기도 하는, 유럽 전역을 시장으로 하는 큰 규모의 악기 회사에요. 그렇게 생각하니 온리 한국 시장 대상인 '스쿨뮤직'과는 비할 바가 아니긴 합니다만…
탄탄해 보이면서도 예쁜 '스파클링 블루' 텔레캐스터가 고작 19만 원 정도라니… 생각해 볼 필요도 없이 주문했습니다. 8만 원이 넘는 국제 배송비가 좀 부담이 되긴 했어도 친구 것까지 두 대를 한꺼번에 주문하니 뭐 그것도 부담이 덜하더라고요.
통관까지 하면 몇 주는 걸릴 것 같았는데 주문하고 어찌어찌하니 1주일 만에 와버렸어요. 엄청나게 큰, 초딩 키만 한 박스 안에 기타 두 대가 들어있더군요. 각각 기타는 꼭 맞는 박스 안에 스티로폼 블록과 폼 커버로 잘 포장되어 상처와 눌린 자국, 충격 없이 먼 길을 잘 날아왔더라고요. 먼저 외관을 한 번 살펴봅니다.
잘 구워진 ‘로스티드 메이플’* 헤드에 Harley Benton 데칼이 단단히 붙어있습니다. 보통 텔레캐스터나 스트라토캐스터에는 스트링 가이드가 1, 2현용으로 하나가 붙어있는데 이건 1, 2현, 3, 4현 도합 2개가 붙어있군요. 어차피 대부분 스트링 가이드는 헤드 부분 불필요한 배음 커트와 텐션 문제니 뭐 있어도 큰 문제는 없으니까요. 반짝반짝 예쁩니다. 헤드도 원조인 펜더 텔레캐스터와 상당히 비슷해 왠지 정이 갑니다.
넥 역시 당연히 로스티드 메이플이고 프렛보드는 로즈우드라고 생각했는데 뭔가 조금 달랐어요. 스펙 시트를 찾아보니 ‘Laurel’이라는 목재더라고요. Laurel은 로즈우드의 대체목으로 쓰이는데, 흔히 이야기하는 월계수입니다. 한국엔 큰 게 없나 본데 외국엔 기타 재료로 쓰일 만큼 큰 월계수 나무가 있나 보더라고요. 느낌은 로즈우드보다 조금 더 단단한데 사운드가 크게 차이 나지는 않습니다. 두텁지 않은 모던 D타입 쉐잎이라 잡기 편하고 곡률도 305mm, 즉 12인치인 슈퍼스트랫 곡률이니 모던해요. 사실…. 관세 배송비 포함 20만 원 중반 악기니 크게 따지지는 않기로 합니다. 프렛 재질은 니켈. 점보 프렛은 아닙니다. 바디와는 여느 텔레캐스터와 마찬가지로 4포인트 볼트온 타입으로 결합되어 있어요. 백플레이트에는 HB라고 붙어있는데 이게 또 에피소드가 있습니다**.
펜더 텔레캐스터 디럭스 모델처럼 바인딩까지 되어 있는 바디 재질은, 몇 피스인지 확인할 순 없지만 바스우드(Basswood)입니다. 보통 바스우드는 좀 텅텅거리는 경향이 있어 DiMarzio 픽업과 궁합을 맞춰 사운드를 보정한다 하는데, 저렴이 기타가 굳이 그렇게 하겠어요? Thomann 자체적으로 개발한 Roswell 알니코 5 싱글 코일 픽업이 일부러 궁합을 맞춘 것 같은데, 3 Way 픽업 셀렉터로 리어 픽업과 프런트 픽업을 선택하거나 믹스할 수 있어요. 사운드는 막판에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바디가 좀 얇아 보이는 건 기분 탓이었나봐요. 4.7cm로 일반 텔레캐스터와 비슷합니다.
브릿지는 3포인트 하드테일 텔레캐스터 타입입니다. 빈티지 스타일이지만 오리지널과 달리 블럭에 스트링 홈이 파여있어 스트링마다 자세한 튠을 조정할 수는 없어도 브리지 포인트가 움직여 피치가 변하는 것은 막도록 처리되어 있었어요. 브릿지 스타일 상 스트로크 하는 위치에 따라 집게손가락 부분을 다칠 수도 있으니 연주할 때 조심해야 할 듯요.
기본적으로 009세트 스트링이 걸려있는데요. 오자마자 제가 보통 쓰는 010세트로 줄을 바꿔 셋업 한 후 합주에 가져가 보았습니다. 제가 텔레와 워낙 궁합이 안 좋아서 좀 걱정되긴 했지만요.
기억을 되짚어 보자면, 이번이 네 번째 텔레에요. 대중음악에 엄청 많이 쓰이는 모델이지만, 이상하게 전 텔레를 쓸 때마다 두 가지가 너무 거슬렸어요. 그 첫 번째는 잡음이었어요. 좀만 게인을 세게 걸면 감당이 안 될 정도의 잡음이 압도적으로 뿜어져 나오거든요.
두 번째는 텔레 특유의 배음이었습니다. 앰프나 이펙터의 EQ를 아무리 깎아도 튀어나오는 텔레캐스터의 배음은 볼륨을 좀 작다 싶을 정도로 줄여도 어김없이 존재감을 나타내더라고요. 그래서 텔레를 쓸 때는 늘 합주에서 사운드 감을 못 잡기 마련이었고, 얼마 안 되어 팔아버리기 일쑤였어요.
Harley Benton 텔레는 과연 어땠을까요. 일단 Thomann의 자체 제작 싱글 코일 픽업이 바스우드 울림을 염두에 둔 건지 바스우드 울림을 잘 잡아줍니다. 잡음 문제도 합격. 워낙 잡음에 민감한 저도 넥을 손으로 잡으면 그냥 넘길만합니다.
드라이브 사운드는 배음이 좀 튀긴 했지만, 꽤 밴드와 잘 어울리는 으르렁거림을 보여주었습니다. 텔레 특유의 프런트와 미들 클린 사운드는 가격 생각을 잊을 정도로 좋더라고요. 제가 합주 때 워낙 무난한 기타들 위주로 들고 다녔는데, 다른 밴드 멤버들도 사운드 괜찮다고 칭찬 일색이었어요. ***
연주감도 괜찮습니다. 주로 빈티지 곡률과 그립을 채택한 펜더 텔레캐스터에 비해 훨씬 편하고 손에 피로감도 없어요. 마감도 꽤 깔끔한 편인데 볼륨과 톤 노브의 너트가 좀 헐렁하게 잠겨있어 꽉 조여주긴 했습니다. 스트링을 갈아 보니, 슬롯에 줄을 길게 넣어 감아넣어야 하는 빈티지 튜너를 흉내만 낸 거라 좀 불편하긴 해요. 뭐 그래도 스트링을 매번 가는 건 아니니 패스. 픽업 셀렉터와 볼륨 노브 간격이 너무 좁은 텔레캐스터의 또 다른 단점은, 노브를 바꿔서 해결했습니다.
2023년 11월 현재, 이 기타는 아직도 제 방 기타 스탠드에 걸려 있습니다. 산 지 며칠 되지도 않았지만 느낌이 좋아요. 200만 원이 훌쩍 넘어가는 펜더 텔레캐스터를 쓸 때보다 소리에 대한 기대감이 덜해서일까 소리도 마음에 들고, 연주하기도 편하더라고요. 부디 이 포스팅을 내년에 볼 때도 이 기타가 제 수중에 있기를 기대해 봅니다.
*로스티드 메이플 이름 그대로, 메이플 목재를 높은 온도에 구운 것을 이야기합니다. 처음에는 벌목이 금지된 ‘로즈우드’의 대체목으로 사용하려고 컬러를 맞춘게 로스티드메이플이었는데요. 차츰 수분에 의한 변형도 적고 소리도 더 명료하다는 장점이 발견되면서 다양한 악기에 쓰이고 있습니다.
**Harley Benton의 백플레이트: 친구것과 두 대를 주문했는데, 백플레이트가 한 대는 민짜, 다른 한 대는 HB 각인이 있더라고요. 같은 모델인데 달라서 물어보니, HB 각인은 한때 잠깐 생산된 것으로 잘못 조립된 것 같다 하더라고요. 원래는 아무 것도 새겨져 있지 않은 민짜 백플레이트가 제공된다 합니다.
***사운드샘플: 아직 녹음은 해두지 않았는데요. 원하시는 분 있으면 댓글로 달아주세요. 한 번 열심히 녹음해 보려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