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9.3~2025.2.23, 아모레퍼시픽 미술관
세계적 건축가 데이비드 치퍼필드가 디자인한 서울 용산의 아모레퍼시픽 본사건물 지하에 위치한 아모레퍼시픽미술관에 실내 수영장이 들어섰다. 다이빙대도 갖추고 있지만 이 수영장은 물이 없다. 수영장 안에는 흰색 래커칠로 마감된 조각상들이 있을 뿐이다. 망원경으로 먼 곳을 바라보는 안전 요원, 우두커니 풀 사이드에 걸어 앉아 수영장 바닥을 바라보는 소년, VR고글을 쓰고 가상현실에 몰입해 있는 청년, 창 밖을 바라보는 아이. 4개의 조각상은 각자의 방식대로, 보고 싶은 것을 보고 있다.
미술관에 들어선 것은 수영장이 아니라 북유럽 출신의 세계적인 아티스트 듀오 엘름그린&드라그셋(Elmgreen & Dragset)의 작품 ‘아모레퍼스픽 수영장(The Amorepacific Pool, 2024)’이다.
실제에 가까운 섬세한 디테일을 갖춘 허구적 현실을 구현해 보임으로써 현대 사회의 권력구조와 고정관념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는 현대미술가 엘름그린&드라그셋의 《Spaces》 (2024.9.4.~2025.2.23.) 전이 아모레퍼스픽미술관의 하반기 현대미술 기획전으로 열린다.
이번 전시는 플라토미술관에서 2015년 열린 ‘천 개의 플라토 공항’ 이후 9년 만에 한국에서 갖는 대규모의 개인전이며, 아시아 최대 규모로 두 사람의 30년 협업을 기념해 지금까지 작업을 한 자리에서 조명하는 전시다.
덴마크 출신의 마이클 엘름그린(Michel Elmgreen)과 노르웨이 출신의 잉가 드라그셋(Ingar Dragset)은 1994년 만나 이듬해부터 아티스트 듀오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화이트 큐브를 거침없이 해체하고 재구성하는 초기 퍼포먼스와 조각작업으로 주목받은 이들은 건축적 요소를 작업에 도입하며 점차 영역을 확장했다. 사막 한 복판에 프라다 매장을 세운 영구 설치작업 ‘프라다 마파(Prada Marfa, 2005)’와 전시장을 집, 지하철역, 공항 수하물 찾는 곳, 병원 병동, 대기실 등 익숙한 장소로 변신시키는 작업을 선보였다. 이들 작업에서도 마찬가지로 규범적인 건축의 틀을 해체하고 다양한 방식으로 공간의 정형성에 의문을 제기했다. 장소의 역사적·사회문화적 맥락에 관여하면서 재현적 구조와 허구적 서사를 통해 현대의 복잡성을 다루는 이들에게 공간 자체가 거대한 캔버스가 된 셈이다.
두 작가의 협업 30주년을 맞아 열리는 이번 전시는 그들의 가장 상징적인 공간 설치작업을 한데 모은 역대 최대 규모의 전시로 실제 크기에 버금가는 대형 수영장, 실물 크기의 가정집, 레스토랑, 주방, 작가 아틀리에 등 5곳의 대규모 공간설치작품을 선보인다. 이들의 작업은 종종 전시가 열리는 곳과 관련해 특정한 역사적 또는 사회적 맥락을 환기시키곤 하지만 이번에는 특정 시간이나 장소에 기반한 서사에 국한하지 않는다. 공간들은 현대사회의 면면을 보여주며 우리 시대의 보다 광범위한 이야기를 전한다.
전시 개막에 앞서 미술관에서 열린 간담회에서 엘름그린과 드라그셋은 “각 공간은 소셜미디어 상에서 불특정다수의 이미지를 스크롤하듯 불연속적으로 펼쳐진다. 일상생활이 디지털과 물리영역 사이에서 어떻게 존재하는지 탐구할 수 있다. 관람객들이 전시장 곳곳을 돌아다니며 숨겨진 단서들을 찾고 내러티브를 발견해 스스로 이야기를 만들어 갈 수 있다”고 설명했다.
“어디까지가 예술이고, 예술이 아닌지는 관람객이 정하는 것”이라는 이들은 “마치 대본을 모른 채 영화 촬영장을 방문하게 된 것처럼 각 장면 안의 캐릭터들이 각자의 삶을 이어가는 것을 보면서 허구적 설정에 몰입하게 된다. 가상현실 속의 인물들이 어떻게 그 공간에서 살아가는지를 물리적 경험을 통해 알아볼 수 있는데 ‘평행 현실’이 존재한다면 그런 모습일 것”이라고 말했다.
첫 번째 전시실에서 만나는 것은 거실, 주방, 침실, 화장실, 아이방, 주인의 작업실 등으로 갖춘 140㎡의 집 ‘섀도 하우스(Shadow House, 2024)이다. 거실에서 볼 수 있는 유일한 캐릭터는 거실창에 입김을 불고 손가락으로 ‘I’라는 글자를 쓰고 있는 어린 소년이다. 하지만 각 공간의 디테일들을 보면서 이 집에 사는 가상의 인물들이 어떤 삶을 사는지 짐작해 볼 수 있다. 이들은 과거에도 집, 가정이라는 주제를 다루며 허구적 설정에 대한 몰입을 유도했다. 베니스비엔날레 국가관을 집으로 전환한 ’ 수집가들(Collectors, 2009)’, 빅토리아앤드알버트 뮤지엄 내부를 건축가의 집으로 재구성한 ‘내일(Tomorrow, 2012)’ 등이 있다.
‘아모레퍼시픽 수영장(Amorepacific Pool)‘에서 보여준 물이 빠진 수영장은 이들의 작업에서 반복되는 모티프로 오늘날 공공장소의 쇠퇴와 공동체의 상실을 암시한다. ‘감시’(2024), ‘로버트’(2024), ‘우리는 이렇게 놀아요. figure3’(2023), ‘The screen(2021)’이라는 타이틀을 가진 조각들은 같은 공간에 존재하지만 각자가 자신만의 세계에 몰두해 있으며 상호작용을 하지 않는 것이 특징이다.
그다음은 ‘The Cloud’라는 이름의 레스토랑이다. 실제 운영 중인 모습과 다름없이 리셉셔니스트가 있고 메뉴판을 준다. 관람객은 테이블 사이를 거닐며 영상통화 중인 여인 형상의 작품을 비롯해 현실과 허구의 경계에 위치한 작품을 마주한다. 테이블에 홀로 앉아 영상통화에 몰두하고 있는 여성은 가상의 친구가 최근 실패한 연애에 대한 독백을 듣고 있다. 기술이 우리의 물리적인 환경과 상호연결된 디지털 세계 간의 경계를 어떻게 허무는지를 보여주는 ‘대화(The Conversation, 2024)’다. 그다음에 만나는 주방은 마치 실험실처럼 꾸며져 있다. 산업용 주방과 실험실이라는 동떨어진 두 장소의 대조는 분자요리학, 현대 식품 시스템, 실험실 과학에 의존하는 현 세태를 떠올리게 한다.
전시 마지막은 흰 벽으로 둘러싸인 작업실이다. 거울로 이루어진 캔버스에 일필휘지로 붓질하는 인물상, 흰 페인트를 바닥에 붓는 인물상은 이들이 작업 초기에 관심을 모았던 퍼포먼스를 연상하게 한다. 시인(엘름그린)과 연극인(드라그셋)의 경험을 지닌 두 사람은 미술기관의 전통적 권위를 상징하는 화이트 큐브 공간을 흰색 페인트로 덮어버렸고(12시간의 흰 페인트/무력한 구조물, 1997), 투명한 유리 큐브의 내부 벽에 페인트를 칠하고 씻어내기를 반복한 작업(무력한 구조물, 1998) 등 시적이고 강렬한 퍼포먼스를 선보였다. 30년간 이어진 이들의 예술적 협업이 어떻게 펼쳐질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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