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빛그루 Sep 28. 2021

작아져야 보이는 것들.

<사자가 작아졌어!> 정성훈 글. 그림, 비룡소

그림책을 좋아하는 많은 이유 중에 하나는 그림책 속에는 '아이'가 있기 때문이다. 그 '아이'는 내가 보살피지 못하고 무시하고 방치했던 바로 나 자신이다. 그림책 속에서 만나는 그 아이를 그제야 안아주고 보듬어주고 말도 걸어주고, 드디어 사랑해줄 수 있어서 나는 그림책을 좋아한다.

동물의 왕 사자가 곤히 낮잠을 자고 있다.

그런데 잠에서 깨자 숲 속 어느 동물보다, 어떤 식물보다 작아져 버린 게 아닌가!! 작아진 몸에 적응을 못한 사자는 여느 때처럼 자신 있게 첨벙첨벙 개울을 건너려다가 개울에 푹 빠져 버렸다. 사자는 죽을힘을 다해 살려달라고 외쳤고 마침 지나가던 가젤이 사자를 발견하고 구해준다.

그런데 가젤은 자신이 구한 이 작은 존재를 가만히 관찰하니 어제 자신의 엄마를 잡아먹은 사자가 아닌가?

앗 이런!! 가젤은 엄마를 빼앗긴 분노가 다시금 치솟아 오르고 사자를 향해 소리친다.


널 당장 다시 물에 빠트려 버려야겠어!
   

어제 먹은 점심이 자신을 구해준 가젤의 엄마였다니!!

사자는 기가 찰 노릇이다. 자신은 그냥 배가 고팠을 뿐이고 점심을 먹으려고 잡았을 뿐이었는데 말이다. 사자는 가젤의 마음을 풀어주기 위해 꽃을 선물하기도 하고, 노래를 불러 주기도 하고, 가젤의 뿔에 멋진 그림을 그려주려고도 하지만 가젤의 마음은 풀어질 틈이 안 보인다. 사자가 자기를 달래주려고 노력할수록 가젤은 오히려 사자를 처음 만났을 때보다도 더 슬퍼졌다.

나는 가젤이 처음보다 더 슬퍼졌다는 이 장면에서 현실 같은 기시감이 느껴졌다. 나의 그 '아이'를 만났기 때문이다. 사자는 그저 배가 고파서 잡아먹었을 뿐이지만 가젤에게는 하나뿐인 엄마였다. 어쩌면 사자에게는 작아지지 않았다면 이해할 필요 없는 그저 당연한 자연의 법칙일지도 모른다. 가젤 역시 그 사실을 ‘알기 때문에’ 더 마음이 힘들고 슬펐을 것이다. 또 가젤은 한순간에 약자가 된 사자가 자신의 마음을 풀어주려고 노력하는 그 모습에서 양가감정을 느꼈을 것이다.


너에겐 당연하지만 나에겐 그렇지 않은 사실들이, 문득 내가 작아지고 약해질 때 들리고 보이는 순간이 있다. 그것은 위대한 깨달음의 순간일 수도 있지만 소위 ‘현타’의 순간이기도 하다. 사실과 진실은 서로 처절하게 다를 수 있다는 현실 자각의 시간 말이다.


많은 이야기를 다양하게 꺼내볼 수 있는 그림책인데 부끄럽게도 어느 한 장면에 꽂혀서 이해할 수 없는 글을 끄적댄 것 같다. 작아진 원수를 만난 가젤의 마음처럼, 내가 좀 그런 마음이라는 것…


작가의 이전글 내 인생의 NG 장면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