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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빛그루 Sep 03. 2021

내 인생의 NG 장면

<백주의 결투>, 마누엘 마르솔, 박선영 옮김, 로그 프레스

스페인 그림책 작가 마누엘 마르솔은 그림책 제목을 영화 <백주의 결투>에서 따왔으며, 등장인물이나 소재를 발, 손, 팔, 얼굴, 활, 권총 등을 클로즈업하고 다시 풀샷을 보여주는 식으로 장면을 나누었는데 그것을 연결하면 마치 영화를 감상하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표지를 양쪽으로 펼치면 붉은 광야가 펼쳐지는데 그 가운데로 냇물이 흐른다. 뿔 달린 버펄로 해골이 보이고 듬성듬성 잡초가 자라고 있다. 암막 같은 검은색 면지를 넘기면 <백주의 결투>라고 제목이 적혀 있고 오른쪽엔 커다랗게 이글이글 거리는 해가 중천에 떠 있다. 다음 장면에서는 선인장이 힐끔 보이고 그 위로 건조한 바람에 굴러다니는 덤블이 보인다.


덤블은 뱀이 칭칭 감고 있는 버펄로 해골을 지나 어느 한 사람의 맨발에 가 닿는다. 그런데 마주 서 있는 발은 웨스턴 추스를 신었다. 이어지는 장면에서 화살을 든 인디언과 권총은 든 카우보이의 일촉즉발의 시간임을 보여 준다. 하지만 다음 클로즈업되는 장면은 카우보이의 권총에 잠시 안착한 청둥오리의 천연덕스런 얼굴이다.

“잠깐! 이건 불공평해.” 카우보이의 불평과 함께 카메라 렌즈는 드디어 두 사람의 풀샷을 보여준다. 작은 냇물을 사이에 두고 팽팽하게 대치했던 것이 무색해지는 장면이 연이어 그려진다. 다시 인디언과 카우보이를 클로즈업해 눈에 힘을 꽉 주고 결투가 시작되는 것처럼 연출하지만 새똥이 카우보이 모자 위로 떨어지더니, 그들은 금세 하늘 위로 지나가는 구름모양이 선인장 모양이니 포크 모양이니 하며 결투는 또다시 뒷전이 되고 만다.


이들은 이후로도 고물 기관차의 요란한 소리 때문에, 또 서로 눈이 맞아 떠나는 그들의 말들 때문에, 그리고 인디언을 공격하려던 독사 때문에 화살은 카우보이의 모자를 뚫고, 카우보이의 총알은 독사를 쫓아내는데 한 몫하게 된다. 온갖 다른 것에 관심을 갖고 상대가 다칠까 걱정하다가 자꾸만 NG 장면을 연출하며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는 이들은 과연 결투다운 결투를 할 수 있을까?


환한 낮동안 냇물을 중간에 두고 대치해 있었던 두 사람은 해가 지고 어둠이 내리자 불을 피우고 그 앞에 나란히 앉아 이야기를 나눈다. 이 장면을 끝으로 카메라는 처음에 이글이글했던 해대신 환한 달을 비추며 엔딩 클레딧이 올라가는 것까지 표현한 그림책이다. 뒷면지의 끝까지 유머를 잃지 않는 작가의 연출력이 돋보인다.

인디언과 카우보이, 역사적으로 어두운 한 부분이지만 너무나 유쾌하게 그려낸 이 그림책을 보면서 감독이 생각하기에 가장 완벽한 장면들을 이어 붙인 영화나 드라마를 떠올렸다. 주인공들이 촬영할 때 단번에 OK 되는 장면도 있겠지만, 순간 웃음이 터져서 NG 장면으로 남는 컷도 많을 테지… 내 인생에도 그런 NG 장면이 많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것이 웃음이든 눈물이든 상관은 없을 것 같다.


우리네 인생은 어쩌면 가장 좋은 장면이란 있을 수 없는 건지도 모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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