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 나와의 화해
해가 어스름하게 져가고, 6~7시나 됐을까.
그 때만 되면 심장이 콩닥콩닥거리면서 떨렸던 게 아직도 기억이 난다.
집에서 뭘 하든 그 시간쯤이 되잖아? 그럼 잘못한 게 없어도 경찰차를 보면 떨렸던 사람마냥 전전긍긍했어.
고등학교 시절에도 그랬던 기억이 있는 걸 보면 꽤 오랜 시간 그랬던 것 같아.
그건 긍정적인 떨림은 아니었고 꽤 부정적이었는데,
나는 왜 그때쯤에 그렇게 오돌오돌 떨었을까?
보통 그쯤 되면 서울에 있는 고등학교에서 선생님으로 근무하던 엄마가 퇴근할 시간이었거든.
너무나 반가웠고 그리웠던 엄마였지만 그만큼 또 무서웠어.
왜냐하면 퇴근하고 오면 엄마에게 혼날 일이 많았으니까.
정확히 어떤 일을 잘못 했는지 기억은 잘 나지 않지만, 학교에서 가져온 생활기록부에 '산만하다'라고 부정적인 워딩이 적혀있던가, 아니면 내가 어려워하는 수학 문제를 잘 풀지 못했거나 그런 사소한 잘못들이 있었던 것 같아.
대학교 때쯤 그 시절 일을 떠올리면 내 잘못 아닌 잘못들로 왜 그렇게 나를 다그쳤을까, 왜 그렇게 별 일 아닌 일들로 그 어린 아이를 밀어부쳤을까. 노을만 봐도 심장이 떨릴 정도의 트라우마를 주었을까.
속으로 많이 원망도 했던 것 같아.
근데 지금 거의 그 시절의 나이가 돼가는 입장에선 엄마가 조금씩 이해가 가. 백프로 이해할 순 없겠지만. 나는 엄마가 그 시절 이뤄놓은 것처럼 집이 있지도 않고 아이도 없고 결혼도 안 했지만 그 시절의 엄마는 많이 힘들었을 거야.
일단 그 때는 엄마가 엄마라 그렇게 많지 않은 나이라는 걸 몰랐거든.
분당에서 서울까지 너무 먼 출퇴근길에다가, 하루 종일 밖에서 일로, 사람들로 시달리고 와서
컨트롤 되지 않는 딸과 하루 종일 남매 육아하느라 힘들었을 엄마의 엄마 눈치,
그리고 도와준다고 해도 쌓여있는 집안일까지.
그 때의 엄마가 그 모든 부담을 떠안고 삶을 뚜벅뚜벅 걸어갔을 생각을 하면 지금의 내가 가서 꼬옥 안아주고 싶어.
아직도 기억나는 게,
엄마가 방학 때 집에 있으면, 내가 유치원 걸어가는 길을 엄마가 집 베란다에서 내려다 볼 수 있었잖아.
그 때 나는 엄마가 집에 있는 게 너무 좋아서 한 두걸음 가다가 뒤돌아보고 손 흔들고, 세걸음 가다가 뒤돌아보고 손 흔들고 했던 기억이 나거든. 엄마도 그 때 일을 나한테 두고두고 말했었지.
그런 딸을 두고 일터에 나가야 했던 엄마 마음을 내가 이해할 수 있을까?
애 낳지 않는 이상은 이해하기 힘들겠지. 내 애가 생겨도 영원히 이해할 수 있을지, 나는 아직 잘 모르겠어.
결국 내가 초등학교 6학년이 되던 해에 엄마는 선생님이라는 꿈을 포기하고 전업주부가 됐잖아.
철없던 나는 그 때 엄마가 다른 엄마들처럼 집에 있는 게 너무 좋았거든?
나도 다른 아이들처럼 학교에 할머니가 오지 않고 엄마가 올 수 있고, 학원이 끝나면 엄마가 데리러 올 수 있고. 마냥 좋기만 했는데 엄마가 그 때 날 위해서 뭘 포기했는지 알게 된 지금 너무 안타깝고 내가 다 아쉬워.
이 얘기를 하면서 미안하다고 한 적 있었는데, 그 당시 엄마도 일이 힘들었다는 말로 날 위로해줬던 게 생각이 나네.
사실 이렇게 엄마를 이해하는 척하고 말을 해도 난 또 엄마를 미워하고 내가 엄마를 생각해주는 것 만큼이나 엄마가 날 생각해주지 않는다고 울고 불고 할지 몰라. 서운해하고 서러워하고.
근데 나처럼 무미건조한 사람이 그런 감정을 느낄 수 있는 사람이 엄마밖에 없다는 거 알아?
그걸로 정상참작 해줘.
막대하는 걸 이해해달라는 게 아니라 그만큼 엄마한테 만큼은 내 모든 감정을 쉬이 들어낼 수 있다는 것을 이해해달라는 뜻이야. 세상을 향해서 내 자신을 드러내는 것이 너무나도 어려운 내가 나를 탄생시킨 사람에게 만큼은 모든 것이 솔직해지는 것이 참 행운인 것 같아. 엄마한테도, 나한테도.
언젠가는 엄마한테도 솔직해질 수 없는 상황이 올 걸 알고 있어서 지금 이 순간이 더없이 소중하다고 생각해.
아직도 엄마에게 짐처럼 느껴질 수 있는 딸이지만 조금만 더 서로 견뎌보자.
우리가 지금처럼 살 부비며 미워하고 좋아하고 할 시간이 많지 않으니깐.
엄마에게 바라는 것이 있다면 무조건 건강. 그리고 조금 천천히 나이드는 것. 엄마도 나에게 그걸 바라겠지?
우리 조금만 덜 싸우자. 그리고 더 많이 수다 떨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