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 천지! 그곳의 야생화는 어떤 모습일까?
황송포습지 야생화 탐사 노동으로 인한 고단함도 맛난 점심식사와 빙천맥주의 시원함으로 말끔히 씻겨 나갔다. 더욱이 오후의 일정은 백두산 북파에 올라 천지를 감상하는 것이었으니 그 기대감에 몸은 더 빨리 회복이 되었을 거다. 백두산 여행의 주된 목적은 야생화 탐사라고 했지만 한국인으로서 백두산 천지를 한시라도 빨리 보고 싶은 마음은 누구나 똑같았을 것이다. 전에 백두산 여행을 다녀오신 어떤 분은 두 번이나 천지에 올랐으나 안개 때문에 천지를 전혀 보지 못했다고 하고 어느 분은 딱 3분간만 천지가 열렸었다고도 한다. 우리는 과연 오늘 온전한 천지를 볼 수 있을까? 일행들 모두 기대와 걱정으로 말을 아끼는 분위기였다.
천지를 보기 위한 여정은 길고 짜증 나는 절차를 거쳐야 했다. 우리를 태운 여행사 버스는 백두산 셔틀버스 터미널까지만 운행할 수 있었다. 거기서부터는 인산인해를 이루는 사람들 틈바구니에서 긴 줄을 서서 기다려 셔틀버스를 타고 백두산 바로 아래 터미널까지 간다. 또 거기서 마이크로버스로 갈아타고 지그재그 경사길을 올라야 한다. 버스 운전사들은 상당히 숙련된 운전실력을 갖추고 있어 보였지만 길이 우로 좌로 꺾일 때마다 승객들의 몸은 관성의 법칙을 거스르지 못해 좌충우돌해야 했다. 상행과 하행 버스가 빠듯이 교행 할 수 있는 도로변의 경사면에는 옅은 노랑의 꽃들이 빼곡히 들어차 있었다. 야생에서 처음 보는 두메양귀비 군락이 시야가 닿은 곳까지 계속 펼쳐져 있었다. 당장 버스에서 내려 그들을 만나보고 싶었지만 버스가 도중에 멈춰 설 수 없는 건 뻔했다. 이 경사길을 발로 걸어서 오르는 게 허용되면 얼마나 신나고 좋은 일일까?
천지 바로 아래 터미널에 도착하니 천지에 오르려는 사람들이 또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우리는 다시 긴 줄을 서서 대기해야 했다. 관리자들이 관광객들의 흐름을 주시하면서 일정한 인원만큼씩 끊어서 천지로 오르게 했다. 대여섯 명의 사람들이 나란히 걸어 오를 수 있는 넓은 오름길이었지만 그 넓은 길이 사람들로 꽉 채워져서 서로 밀치 듯하며 천지로 올랐다. 나는 줄을 서지 않아도 되는 아래쪽 천지 코스를 먼저 선택했다. 길목과 경사면을 장식하고 있는 두메양귀비와 구름범위귀에 카메라를 들이대며 감탄을 자아내다 보니 어느새 새파란 천지의 모습이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아~ 이 감동을 어찌 말로 표현할 수 있을까? 동행한 여성분들 몇은 가슴이 너무 뛰어서 잠깐 동안 숨이 쉬어지지 않았다고 하기도 하고 어떤 분은 자신도 모르게 울컥해져서 눈물이 맺혀다고도 했다. 과학적으로 말하면, 천지는 화산활동으로 생겨난 분화구에 물이 가득 찬 것이고 물이 맑고 깊어서 푸른색이 더 신비스러워 보이는 것이고, 천지를 둘러싼 봉우리들이 가파르게 천지로 뻗어 내려서 더 웅장해 보이는 것뿐인데...
나중에 인터넷을 통해 검색해 보니, 전 세계의 주요 칼데라(Caldera) 호수들과 비교해 봤을 때 천지가 면적으로는 등위 안에 들지 못했다. 그래서 서양 관광객은 하나도 보이지 않았던 것인가? 하지만, 호수의 깊이를 기준으로 보면, 미국의 크레이터 호수 (594미터), 인도네시아의 토바 호수 (505미터)에 이어 천지는 384미터로 3위를 차지하고 있었다. 면적이 다른 칼데라 호수에 비해 넓지 않다고 했지만 둘레가 무려 14.4km가 된다고 하니 충분히 크고도 웅장했다.
게다가, 천지의 물은 70%가 지하에서 계속 솟아나 채워지고 있고, 나머지 30%가 강수에 의해 추가되는 것이라고 하니 경이롭지 않을 수 없었다. 대부분의 다른 칼데라 호수와는 달리 지하에서 계속 솟아나 채워지는 물 때문에 천지는 일정하게 흘러넘쳐서 웅장한 장백폭포(비룡폭포)를 만들어내고 그 물은 금강대협곡을 따라 흘러서 마침내 두만강, 압록강, 송화강을 이룬다. 이 세 개의 큰 물줄기를 기반으로 살아가는 주변의 식물과 동물들에게 천지는 생명의 원천이다. 그러니 천지가 신비롭다는 말은 과학적으로도 설득력이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사람들 사이를 비집고 다니며 천지의 감동적인 광경들을 다양한 앵글로 담아낸 후 나는 위쪽 조망점으로 가려는 관광객들의 대열에 합류했다. 대기줄에서 기다리는 동안 멀리로는 아름답고 장엄하게 펼쳐지는 금강대협곡의 광경에 넋을 잃을 지경이었고 가까이로는 계단길 목책 너머로 끝없는 군락을 이루고 있는 두메양귀비와 구름범의귀를 감상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한동안 대기 후 우리 차례가 되었을 때 나는 아름다운 금강대협곡을 배경으로 두메양귀비와 구름범의귀를 사진에 담아가며 천지에 올랐다. 위쪽 조망점에서 보는 천지는 더 신비롭고 웅장했다. 아래쪽에서 보았을 때 이미 감동의 에너지를 상당히 소비한 상태였지만 그 신비로운 아름다움이 가져다주는 감동은 여전했다. 게다가, 목책 너머에 천지 더 가까이 피어난 한두 송이 두메양귀비의 옅은 노랑은 짙푸른 천지 물빛과 기가 막힌 조화를 이루어 내고 있었다. 그토록 보고 싶었던 천지와 두메양귀비가 같은 프레임 안에서 최고의 조화를 이루고 있으니 더 바랄 것이 뭐가 있을까? 색감도 구도도 정말 완벽했다.
나중에 들은 바로는 누구는 세 번이나 백두산에 올랐으나 천지를 한 번도 보지 못했다고 했다. 나는 첫 번째 방문에 천지를 또렷이 그리고 맘껏 감상할 수 있었으니 얼마나 큰 행운이던가? 다양한 앵글로 천지의 다양한 모습들을 담아내느라 나는 조망터에 최대한 오래 머물렀다. 사진에 담느라 곳곳을 자세히 살피다 보니 천지 맞은편 봉우리(장군봉)에서 뻗어 내린 흰색 선이 보였고 그 아래 뭔가 시설물이 희미하게나마 눈에 들어왔다. 곰곰이 생각해 보니, 몇 년 전 남북의 두 정상이 만나 천지 물을 함께 만지며 친선을 과시했던 그곳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순간 참 슬프고도 씁쓸했다. 그 화해무드가 잘 진행이 되었더라면 우리도 저곳을 방문할 수 있었을 텐데. 저 천지 물을 나도 만져볼 수 있었을 텐데.
천지 여정을 모두 마친 후 다시 마이크로 셔틀버스를 타고 백두산을 내려오는 중에도 내 마음은 여전히 천지의 아름다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빙천맥주를 시원하게 마시며 저녁식사를 하고 있는 그 시간까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