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황송포습지, 습지 생태의 모델
야생화 탐사여정 둘째 날, 우리는 이도백하 숙소를 오전 8시에 출발해 탐사활동을 시작했다. 오전 탐사장소는 숙소에서 40여분 거리에 있는 황송포습지였다. 우리는 안내팀이 준비해 놓은 장화를 하나씩 챙겨서 갈아 신고는 습지 탐사를 시작했다. 습지는 꽤 큰 규모로 데크길로만 걸어도 한 바퀴 돌아볼 수 있었지만 야생화를 제대로 감상하려면 데크의 목재 울타리를 자주 넘나들어야 했다.
습지가 다양한 생명체의 본향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황송포습지는 정말 다양한 식생들이 함께 모여사는 어머니의 품 같은 곳이라는 걸 체험하게 해 줬다. 습지 입구부터 우리는 높은 목재 울타리를 넘어서 관목이 우거진 습지로 들어갔다. 와우~ 첫 번째로 눈에 띈 것은 월귤과 들쭉나무 열매였다. 한국에서는 홍천, 인제 등 몇 곳에서만 관찰가능하다고 말로만 들어왔던 월귤과 들쭉나무 열매가 습지 여기저기에서 쉽게 관찰되었다. 블루베리와 모양도 맛도 비슷한 들쭉열매를 우리는 몇 개씩 따먹어 보며 이 보배들을 사진에 담기에 바빴다. 개들쭉나무라고 불리는 댕댕이나무도 들쭉나무 군락 속에 섞여서 눈에 띄었다. 같은 곳에 백산차와 좁은백산차가 같이 어우러져 왕성하게 번식하고 있었다. 꽃은 이미 지고 열매가 달리기 시작하고 있었는데 한국의 어느 수목원에서만 보았던 식물을 야생에서 직접 만나보니 더 감동적이었다. 잎에서 발산하는 향기는 참 그윽했다. 그래서 이름에 '-차'라는 접미어가 붙었을 게다.
여러 가지 난초들도 볼 수 있었다. 처음 보는 산제비란과 애기사철란이 습지의 그늘 지역 여기저기서 눈에 띄었고, 물기가 많고 햇볕이 드는 밝은 습지에선 흰색이 돋보이는 잠자리난초가 자태를 뽐내며 우리를 유혹했다. 어떤 분은 그 난초에 눈을 고정시키고 앞만 보고 나아가다가 물구덩이에 장화가 빠져드는 바람에 꽤 고생을 했다는 후문도 있었다. 난초와 비슷해 보이지만 난초과가 아니라 백합과에 속하는 나도옥잠화도 여기저기서 눈에 띄었다. 모두들 꽃이 시들어가고 있는 상태라서 좀 더 이른 시기에 방문하지 못한 게 아쉬웠다.
여기서 만나는 모든 식생이 귀하고 소중했지만 황송포습지의 최고 인기 스타는 아마도 린네풀이었을 게다. 스웨덴 식물학자로서 식물분류학의 기초를 마련한 칼 폰 린네(Carl von Linné)의 이름을 따서 지어진 식물명이다. 덩굴성 식물인데 가느다란 꽃대가 상부에서 두 개로 갈라져 각기 나팔꽃 모양의 꽃을 하나씩 달고 있는 모습이 참 인상적이었다. 식물의 종명(species)이 속명(generic name)과 종소명(specific name) 두 개로 구분되어 표기되는 모습과 유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면에서 식물분류 시스템을 창안한 식물학자 린네와 참 잘 어울리는 식물이라는 생각을 해봤다.
황송포습지의 물이 많은 지역에서는 진흙과 이끼 등이 서로 얽혀서 이루어진 두터운 생태 카펫이 물 위에 둥둥 떠 있는 것 같아 보였다. 장화를 신고 그 위를 걷는 느낌은 참으로 특별했다. 물 위에 출렁거리는 양탄자를 걷는 느낌이라고나 할까? 물컹한 두터운 스펀지 위를 걷는 느낌이라고 하는 게 더 어울릴까? 이런 특별한 생태환경 속에는 정말 특별한 식생들이 많이 번식하고 있었다. 낮고 흥건한 물 위에 부유하며 수면에서 샛노란 꽃을 피우는 물미나리아재비, 타래 모양의 잎과 줄기는 물속에 잠겨 있고 그 옆에서 화려한 노랑꽃을 피워 올리는 개통발, 몸체는 끈적끈적한 털로 이루어져서 만져보기가 겁이 날 정도지만 그 옆에 하얗고 뽀얗고 깔끔한 꽃을 피워 올리는 끈끈이주걱. 모두들 너무 아름다워서 사진을 담고 나서도 눈을 떼기가 힘들었다.
같은 습지에서도 물기가 더 많은 지역에는 황새풀, 애기황새풀, 독미나리, 조름나물, 긴잎곰취, 가는오이풀, 꽃창포, 부채붓꽃, 고양이수염, 별사초, 넌출월귤, 장지채, 곡정초 등이 곳곳을 가득 채우고 있었고, 물기가 상대적으로 적은 데크 바깥쪽 숲 지역에는 주걱노루발, 콩팥노루발, 만년석송, 숫잔대, 민솜대, 큰두루미꽃, 좁쌀풀 등이 자리를 차지했다. 그 밖에도 한국에는 자생하지 않는다는 잎갈나무, 좀자작나무(안내자의 말로 부전자작나무), 당마가목, 아광나무와 더불어 한국에서도 관찰가능한 꼬리조팝나무와 생열귀나무도 여럿 볼 수 있었다.
두 시간가량 장화를 신고 습지를 누비다 보니 체력이 고갈되는 걸 느꼈다. 최대한 많은 식생들을 사진에 담고서 데크를 돌아 나오는데, 중국인 인부들이 습지에서 뭔가를 채취해 데크 위에 쌓아 올리고 있었다. 가정에서 난초를 가꾸는 분들에게 비싼 값으로 팔린다는 스패그넘모스라는 식물이라고 했다. 난초 애호가들에게는 수태라고 불리는 일종의 이끼인데 햇볕에 말려서 건조한 상태로 판매가 되며 물에 담그면 엄청나게 많은 수분을 오래도록 간직할 수 있다고 한다. 이 습지 생태계를 유지하는데 필요불가결한 식생일 텐데 마구 채취되는 것 같아 안타까웠다. 생태를 파괴하지 않을 정도로 적절히만 채취해 가길 간절히 바랐다. 버스로 돌아온 후에도 황송포습지의 다양한 식생과 아름다움에 여전히 압도되어 한동안 정신을 차리고 못했다고 하면 과장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