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Still, Alice
자신을 잃게 된다는 것은 어떤 감정일까. 기억하는 순간보다 기억할 수 없는 순간들이 많아진다면 그런 삶에 의미가 있을까. 영화 <스틸 앨리스>는 이러한 질문에 답하는 한 여인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세계적인 언어학자이자 사랑하는 남편과 장성한 세 아이를 둔 엄마 '앨리스'. 일과 가정 어느 것 하나 놓치지 않고 좋은 인생을 살았다고 생각하는 순간, 그녀는 조발성 알츠하이머에 걸리게 된다. 뛰어난 언변으로 늘 찬사를 받았던 그녀는 한순간에 자신을 잃게 된다. 그녀의 나이 50. 할 수 있는 일도, 해야 할 일도 많았던 그녀에게 알츠하이머는 잔인한 병이었다.
영화는 앨리스가 기억을 잃어가는 전 과정을 보여주면서, 그녀가 알츠하이머를 대하는 하루하루의 일상을 보여준다. 그녀는 다른 사람들과 별반 다르지 않은 평온한 나날을 보내다가도, 벼랑 끝에 매달리는 고통과 좌절감을 겪기도 한다. 시간이 흐를수록 앨리스는 자신에 대한 상실감을 느끼게 되고, 주변은 물론 자신에게마저 낯선 감정을 느끼게 된다. 이성을 잃어버린 그녀를 어떻게 할지 의논하는 가족들의 모습은 앨리스의 외로움과 소외감을 여실히 보여준 장면이었다.
그녀의 지성과 언어학자라는 타이틀은 많은 것을 시사한다. 앨리스의 높은 지성은 그녀의 병이 급속도로 악화되는 것을 막았고, 기억을 잃는 상황 속에서도 품위를 잃지 않고 세상을 버티는 원동력이 됐다. 그러나 한편으로 그녀의 지성은 그보다 더한 고통을 주기도 했다. 세계에서 권위 있는 언어학자가 '언어'를 잃어간다면, 평생 언어를 공부해오던 자신이 언어를 잃어가야 한다면, 그 고통은 얼마나 클까. 그 누구보다 다양한 언어를 쓰고 정확한 표현을 해오던 사람인데, 그런 자신이 간단한 단어 하나 조차 생각나지 않을 때 느끼는 좌절감과 수치심을 우리가 가늠할 수 있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앨리스는 영화의 제목처럼 '여전히 앨리스'이기 위해 노력한다.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하며 하루하루를 버틴다. 자신의 이성이 남아있는 동안 교수직을 정리하고, 미래의 자신을 위한 영상을 준비하는 등 기억 없이 살아야 하는 삶을 담담하게 준비한다. 현실적인 대안을 마련하기 위해 애쓰고, 스스로 생각할 수 있는 능력을 온몸으로 누리기 위해 노력한다. 영화 내내 워드 퍼즐을 맞추는 앨리스의 모습은 알츠하이머라는 극도의 공포에 맞서는 그녀의 노력을 보여준다. 영화의 하이라이트라 꼽을 수 있는 앨리스의 강연은 지금도 여전히 많은 곳에서 인용되고 있다. "Live in the moment", 지금 이 순간을 살라고 스스로에게 말합니다. 그게 제가 할 수 있는 전부니까요. 저는 고통스럽지 않습니다. 애쓰고 있을 뿐입니다. 이 세상의 일부가 되기 위해, 예전의 나로 남아있기 위해."
스틸 앨리스는 알츠하이머라는 다소 익숙한 소재를 썼지만, 사회 보편적 문제로 제기하지 않고 개인의 삶에 투영해 현실감을 더했다. 점점 사라지는 자신의 기억에 당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하는 그녀의 눈빛은 외롭고 쓸쓸한 한 여성의 삶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또한 <스틸 앨리스>는 쓸데없는 신파극이 없다. 강인하고 격조 있는 이미지를 가진 줄리앤 무어의 앨리스 연기는 알츠하이머에 걸린 언어학자의 처연함을 극대화시켰다.
루게릭병으로 투병 중이던 리처드 글랫저 감독은 무슨 말을 하고 싶었을까. 영화의 끝에서 노골적으로 말하지만, 결국 가족의 사랑이다. 자신의 기억과 역할을 점점 잃어가며 두려움과 좌절을 느끼는 앨리스에게 리디아가 사랑을 표현하듯이, <스틸 앨리스>는 가족의 사랑으로 시작과 끝을 맺는다. 결국 모든 걸 잊어도 사랑은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