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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티치 Apr 04. 2022

[단편 글] 너가 선물해 준 토성 고리

창작 글

밤이야. 하늘은 텅 비어있어. 별 조차도 없네.


네가 선물해준 시집의 마지막 장을 덮었어. 마침 네게 연락이 오진 않았을까 기대가 되는데. 지금 전화기는 안 볼래.

공기가 한적해. 시집을 좀 전에 덮어서 그런가. 자잘한 고독의 방울이 공기에 뒤섞여서 떠다니는 것 같아.

지금 당장 네게 전화를 걸어 시집의 구절을 나누고 싶어. 오래도 묵혀둔 그 갈증이 물 한잔으로 가시리요. 영겁의 바다만이 그대 목을 축일 수 있으리. 쏟아져주세요 내게. 한 없이 쏟아져주세요.

하지만 아직 난 네 번호가 없어. 용기를 내어 보이스톡을 걸어봤어. 바로 받다니. 넌 낯을 가린댔잖아.

목소리를 듣자하니 넌 집에 사뒀다던 위스키를 세 잔쯤 들이킨 것 같네. 굴러가는 말소리가 평소보다 끈적해.

어제 낮에 만난데서 보자.





이마와 손등에 키스를 퍼부었다. 아련한 따스함이 남는다. 파란 하늘로 날아갈 나에게 그는 마지막 순간까지 마음이 바뀌진 않았는지 물어보았다. 저번주에도. 3일전에 함께 음악을 들으러 갔을 때에도. 어제 밤 마지막으로 길고 긴 통화를 끝냈을 때도. 


나는 확신에 찬 눈빛으로 고개를 젓는다. 이제 떠날 때가 되었어. 같은 곳에 너무 오래 머물렀어. 이 곳에서 이제 벗어나고 싶어.


다음주에 서둘러 돌아올 수도 있고. 1-2년쯤 새로운 인생의 장막을 열어볼 수도 있어. 길다면 긴, 짧다면 짧은 탐색을 거치다 고향이 그리워져 돌아올 수도 있지. 어쩌면 영영 돌아오지 않을 수도. 언제 돌아올 지 몰라 오히려 짐을 가볍게 챙겼다. 속옷 몇 개와 좋아하는 상하의 몇 벌. 제일 튀는 색으로 챙겼어. 혼자 우울해지기라도 하면 색깔에 휩싸여 지낼 수 있도록. 

장발의 음악가였어. 그는 내게 노래를 만들어줬고, 연주를 해줬지. 그의 투명한 뿔테는 큼지막한 쌍커풀을 더 예쁘게 투영해냈다. 

투명 뿔테 안의 그 눈이 나를 잠자코 들어다봤다. 


넌 자유로워서 좋아. 그런데 알 수가 없어서 너무 밉기도 해.


말 수가 적은 그였는데. 필요한 순간에 침묵을 지우는 그가 좋았다. 아지랑이처럼 나를 흔드는 따스한 긴 손가락이 좋았다. 시집을 낭독하듯 간지러운 말로 그는 나를 보내주네. 


우리는 함께 음악을 듣고 맥주를 마시며 언제인지 모르게 서로에게 녹아들었고. 밤이면 전화를 했다. 전화가 열이 오를 때면 나와서 밤 거리를 걸었다. 손을 잡고 차가운 공기로 열기를 식히려 했으나 보통 더 달궈졌다. 그러면 그의 집 혹은 나의 집으로 향해 가볍게 나무 스피커로 FKJ의 음악을 듣다가 스르르 잠에 들었다. 


자연스럽게 인생에 찾아온 음악쟁이와 나는 또 자연스레 인사를 건냈네. 내일 볼 것처럼 그는 입술 한 꼬리를 올려 미세한 미소를 건네고 나는 함박웃음으로 화답하네. 


그가 갑자기 바닥에 쭈그려 앉는다. 파란 내 캐리어 가방에 금색빛 토성 고리를 달아줬다. 


타투 하고 싶어했잖아. 아직 못했으니까. 가방에라도 새기고 가라고.




멍하니 공항에 있다보니 어느덧 비행기를 타러 갈 시간이다.


토성 고리는 금색 빛이다. 파란색 캐리어에 금색 빛 토성은 너무 잘 어울렸다. 물결에 반사되는 햇빛같이 고리가 빛났다. 아쉬움이 남을까 얼른 시선을 뗐다.


뒤를 돌아보지 않고 걷는다. 하루의 첫 비행기라 그런지 소지품 검사를 위한 줄도 얼마 없다. 공항에서 맡는 새벽의 퀴퀴한 이산화탄소 냄새. 반갑다. 그리웠다.


불안하고 쓸쓸하다. 동시에 굉장히 설레인다. 이 순간이 올 줄 알았다. 영겁의 지루함을 견뎌내면 가끔씩은 기다렸다는 듯 반갑고 짜릿한 오묘함이 찾아온다. 지금처럼. 결코 단순한 흑백의 감정으로 전달할 수 없다. 소용돌이처럼 뒤엉켜있다. 오늘은 충분히 섞이지 않은 퀴퀴한 회색빛 쓸쓸함과 설레는 금빛이 함께하는 날이다.


어느새 비행기 좌석을 찾아 앉는다. 캐리어는 선반에 올렸다. 멀미 패치를 귀밑에 붙인다. 오프라인으로 저장해 둔 가사 없는 노래를 귀에 꽂는다.


이륙 직전이 제일 불안해. 안대를 뒤집어쓴다. 몸이 붕 뜬다. 떠난다.


떠난다는 건 뭘까. 난 무엇으로부터 떠나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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