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 글
네가 선물해준 시집의 마지막 장을 덮었어. 마침 네게 연락이 오진 않았을까 기대가 되는데. 지금 전화기는 안 볼래.
공기가 한적해. 시집을 좀 전에 덮어서 그런가. 자잘한 고독의 방울이 공기에 뒤섞여서 떠다니는 것 같아.
지금 당장 네게 전화를 걸어 시집의 구절을 나누고 싶어. 오래도 묵혀둔 그 갈증이 물 한잔으로 가시리요. 영겁의 바다만이 그대 목을 축일 수 있으리. 쏟아져주세요 내게. 한 없이 쏟아져주세요.
하지만 아직 난 네 번호가 없어. 용기를 내어 보이스톡을 걸어봤어. 바로 받다니. 넌 낯을 가린댔잖아.
목소리를 듣자하니 넌 집에 사뒀다던 위스키를 세 잔쯤 들이킨 것 같네. 굴러가는 말소리가 평소보다 끈적해.
어제 낮에 만난데서 보자.
나는 확신에 찬 눈빛으로 고개를 젓는다. 이제 떠날 때가 되었어. 같은 곳에 너무 오래 머물렀어. 이 곳에서 이제 벗어나고 싶어.
다음주에 서둘러 돌아올 수도 있고. 1-2년쯤 새로운 인생의 장막을 열어볼 수도 있어. 길다면 긴, 짧다면 짧은 탐색을 거치다 고향이 그리워져 돌아올 수도 있지. 어쩌면 영영 돌아오지 않을 수도. 언제 돌아올 지 몰라 오히려 짐을 가볍게 챙겼다. 속옷 몇 개와 좋아하는 상하의 몇 벌. 제일 튀는 색으로 챙겼어. 혼자 우울해지기라도 하면 색깔에 휩싸여 지낼 수 있도록.
장발의 음악가였어. 그는 내게 노래를 만들어줬고, 연주를 해줬지. 그의 투명한 뿔테는 큼지막한 쌍커풀을 더 예쁘게 투영해냈다.
투명 뿔테 안의 그 눈이 나를 잠자코 들어다봤다.
넌 자유로워서 좋아. 그런데 알 수가 없어서 너무 밉기도 해.
말 수가 적은 그였는데. 필요한 순간에 침묵을 지우는 그가 좋았다. 아지랑이처럼 나를 흔드는 따스한 긴 손가락이 좋았다. 시집을 낭독하듯 간지러운 말로 그는 나를 보내주네.
우리는 함께 음악을 듣고 맥주를 마시며 언제인지 모르게 서로에게 녹아들었고. 밤이면 전화를 했다. 전화가 열이 오를 때면 나와서 밤 거리를 걸었다. 손을 잡고 차가운 공기로 열기를 식히려 했으나 보통 더 달궈졌다. 그러면 그의 집 혹은 나의 집으로 향해 가볍게 나무 스피커로 FKJ의 음악을 듣다가 스르르 잠에 들었다.
자연스럽게 인생에 찾아온 음악쟁이와 나는 또 자연스레 인사를 건냈네. 내일 볼 것처럼 그는 입술 한 꼬리를 올려 미세한 미소를 건네고 나는 함박웃음으로 화답하네.
그가 갑자기 바닥에 쭈그려 앉는다. 파란 내 캐리어 가방에 금색빛 토성 고리를 달아줬다.
타투 하고 싶어했잖아. 아직 못했으니까. 가방에라도 새기고 가라고.
토성 고리는 금색 빛이다. 파란색 캐리어에 금색 빛 토성은 너무 잘 어울렸다. 물결에 반사되는 햇빛같이 고리가 빛났다. 아쉬움이 남을까 얼른 시선을 뗐다.
뒤를 돌아보지 않고 걷는다. 하루의 첫 비행기라 그런지 소지품 검사를 위한 줄도 얼마 없다. 공항에서 맡는 새벽의 퀴퀴한 이산화탄소 냄새. 반갑다. 그리웠다.
불안하고 쓸쓸하다. 동시에 굉장히 설레인다. 이 순간이 올 줄 알았다. 영겁의 지루함을 견뎌내면 가끔씩은 기다렸다는 듯 반갑고 짜릿한 오묘함이 찾아온다. 지금처럼. 결코 단순한 흑백의 감정으로 전달할 수 없다. 소용돌이처럼 뒤엉켜있다. 오늘은 충분히 섞이지 않은 퀴퀴한 회색빛 쓸쓸함과 설레는 금빛이 함께하는 날이다.
어느새 비행기 좌석을 찾아 앉는다. 캐리어는 선반에 올렸다. 멀미 패치를 귀밑에 붙인다. 오프라인으로 저장해 둔 가사 없는 노래를 귀에 꽂는다.
이륙 직전이 제일 불안해. 안대를 뒤집어쓴다. 몸이 붕 뜬다. 떠난다.
떠난다는 건 뭘까. 난 무엇으로부터 떠나는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