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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어쩌다반도네온 May 19. 2020

나는  어쩌다 반도네온을 하게 되었나

0. 어느날, 나는 망했다.

  나는 장사꾼이다.

 생방송 아침프로에 명찰을 달고 나갈만큼 꽤, 프로 장사꾼이었다. 돈을 버는 것이 가장 큰 목표였던 20대 중반부터 정말 독하게 장사를 했다. 첫번째 창업을 그럭저럭 해 내고, 그 경험으로 3년 뒤 두번째 창업을 했을 때 내 통장에는 달랑 8만원이 남아 있었다. 차비를 아끼려고 차디 찬 타일 바닥에 침낭을 깔고 한 겨울을 버티며 독하게 일했더니 어느새 서울 시내에 매장을 4개 내고 일 하는 스텝이 수 십명이 되었다. 돈 벌기가 쉬워졌다. 그렇게 장사를 시작한지 십년이 지나 월세를 수 천만원씩 내던 어느 날, 나는 망했다.


  여느 장사꾼이 그렇듯 나는 내가 망할 줄 몰랐다. 무턱대고 계약서에 도장을 잘 못 찍어버린 탓이라 여겼다. 나는 너무 순진했고 건물 놈들이 죽일 놈들이라고 그땐 생각했는데, 지금 다시 돌이켜보면 그냥 내가 멍청했다. 장사는, 돈은, 원래 그런 것이다.

  망하고 나니 인생이 허무해 졌다. 하루 하루 의미가 없었다. 나는 그저 돈을 벌려고 살았는데 십년이 지났고 돈은 없었다. 그러면 나는 왜 살았나. 왜 사나. 살 필요가 있나?

 침대에 누워서 하얀 천장과 컴퓨터 모니터만 번갈아 보면서 의미없는 날들을 보내다 우연히 인터넷에서 한 갤러리를 찾았다.


 금천아트캠프 뒷 마당의 아뜰리에 오, 도하 프로젝트.











  어렵다. 장사꾼에게 예술이라니. 무슨 소린지 당최 모르겠다. 눈에 들어오는 문장은 단 하나.


‘나를 건드리지 마십시오’ 가 아니라 ‘함께 이 견고한 세계를 건드려 봅시다’



  그리하여, 왜 사는지 도대체 모르겠어서 집에만 처박혀 ‘나를 건드리지 마시오’ 모드로 있던 나는 간만에 세상을 건드려 보러 나왔다.








  갤러리로 가는 시궁창같은 길에 쪼그리고 앉은 안타까운 인간.

  날개인 줄 았았는데 가시였나요. 돈을 벌 수 있을 줄 알았는데 말아먹었나요. 라고 내게 말하는 것 같다.

작품이 드문드문 있는 철거중인 군부대의 삭막한 길을 한참 걸어 도착한 갤러리는 낡은 목욕탕 건물을 빌려 쓰고 있었다.






  폐쇠된 군부대의 목욕탕에 어지럽게 설치된 푸른 쉬폰. 어렴풋이 보이지만 또렷하지 않고, 그래도 보이긴 하니 희망을 가져 봄 직 하지만 닿을 수 없고. 겹겹이 겹쳐진 쉬폰이 왠지 괴롭다. 44인치 쉬폰, 동대문종합시장 2층 D동 즈음, 한 마에 얼마지, 총 몇마 들었지, 롤로 샀겠지, 퀵으로 받았나, 따위의 생각을 하며 음습한 폐목욕탕을 나와 햇살이 반짝이는 잡초 밭에서 마주친 작은 공연.






컴컴하고 심난하고 미로같은 목욕탕에서 나와서였을까.

반짝이는 햇살 아래 저 이상한 상자에서 나오는 소리는 묘하게 마음을 어루만졌다. 초가을의 햇살, 바람에 살랑이는 나뭇잎, 노란 들꽃.  저 소리가 가지고 싶어졌다.




이거 모에요?


반도네온이요.


... 어디 팔아요?


부에노스아이레스요.





그렇게 나의 여행은 시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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