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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키티 Jun 01. 2020

유통기한이 지났습니다

   

모두 제자리로 돌아갔다. 한 달 가까이 함께 지냈던 동생이 집으로 돌아갔고, 1주일 머물렀던 강아지도 주인에게 갔다. 타의에 의해 움직여야 했던 시간도 끝이다. 분위기 전환이 필요한 시점이다. 외로움이 찾아올 시기이기 때문이다.     


괜히 몸이라도 움직여보자 싶어 방 가구 배치를 바꾸고, 냉장고 문을 열었다. 냉장고 청소는 집안일 중에서도 난이도 상 정도의 일이다. 큰 맘 먹지 않으면 중도포기 상태가 오기 때문이다. 몇 달 정도 집에서 음식을 해먹질 않아 버릴 재료는 없었는데, 뜯어보지도 못하고 유통기간이 지난 것들이 쏟아진다.      

“왜 요즘엔 집에서 요리 안 해?”     


SNS에 음식 사진을 올리며 나의 먹부림을 자랑하곤 했는데, 한동안 뜸하니 친구 몇몇이 물어봤다. 일주일에 며칠 들어오지 않던 동생조차도 맛있는 거 안 해주냐고 물어봤을 정도니. 그 몇 달 사이 누군가를 위해 요리하는 재미가 꽤나 컸던 것일까. 온전히 나를 위해 공들여 무언가를 만들어 먹는 게 싫어졌다. 좋았던 게 싫어질 수도 있는 거니까.      


유통기한이 지나버린 인간관계와 이제 막 시작된 관계들이 뒤엉켰던 5월. 안간힘을 쓰고 버텨왔던 4월이 무의미해져버렸다. 서서히 가라앉아 하루라도 빨리 바닥에 내려앉길 기다렸다. 내가 어디에 있는지 모르는 상태에선 발버둥 친다한들 수면 위로 올라오지 못한다는 것을 아주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바닥에 발이 닿았을 때의 안도감. 그리고 다시 헤엄쳐 올라가면 되니.


덤덤해서 나의 방어력이 세진 줄 알았건만, 도루묵이었다. 주변 친구들이 모두 너 그러다 탈 날 텐데 하며 걱정하다가도, 나를 너무나 잘 알고 있던 이들은 ‘그러다 말겠지’했다고. 뱉어버리면 증발해버릴 말들을 수도 없이 하니 조금은 가벼워진 것 같은 마음.      

유월 첫날부터 비가 내린다. 모든 것을 씻어내겠다는 듯이. 늦은 밤 무슨 바람이 들었는지 집 청소를 시작했다. 이불커버를 바꾸고 마른 빨래를 정리했다. 식탁 위치를 바꾸고, 생일선물로 받았던 아로마를 틀었다. 오늘의 향은 ‘HOME’. 먼지 쌓인 턴테이블도 닦고 오늘은 비가 오니까 유재하. 6월의 첫 영화는 ‘아비정전’으로 정했고 첫 책은 ‘어린왕자’로 정했다.      








그간의 근황들.      

5월엔 윤형근 전과 국현에서 열린 전시들을 보고 왔다. 금요일 저녁 나의 고정 스케줄인 미술관가기를 코로나19가 빼앗아 갔더랬다. 사회적 거리두기가 종료되고 다시 문을 열었고, 열자마자 달려갔다. 입국수속과도 흡사한 과정을 거치고 나서야 들어갈 수 있었다. 한 번 더 보고 싶은 전시였는데, 다시 문을 닫아버렸고 전시도 끝났다.       


5월의 마지막은 ‘패왕별희’를 보았다. 나의 장국영. 개봉이 미뤄져서 5월에서야 보게 됐는데, 결국 혼자 보게 됐다. 씨네큐브에 3개월 만에 갔는데, 지하로 내려가는 에스컬레이터에 올라탄 순간, 어찌나 행복하던지. 탭댄스 출뻔했네. 평범했던 일상들이 특별해지는 순간. 1관 특유의 커튼 냄새가 나지 않아 봤더니, 자줏빛 커튼을 모두 떼버렸다. 줄을 서 체온을 재고 자리에 앉았다. 코로나19로 인해 한자리씩 떨어져 앉아야 했고, 마스크를 착용하고 장장 3시간의 영화 상영을 시작했다. 불온했던 역사의 파편이 박혀버린 청데이의 삶은 우희 그 자체였다. 탄생부터 환영받지 못했던 그의 생이 유일하게 빛났던 순간은 무대 위 뿐이었는데 그조차도 부정 당한다. 장국영의 연기는 왜 볼 때마다 다른 지점에서 감탄하는지 모르겠는데, 내가 그를 여전히 사랑하는 이유이기도 하지. 밤에 봐야하는 영화인데, 아침부터 보고 나왔더니 해가 중천에 떠있었다. 멍한 정신으로 쨍쨍한 광화문을 걸었다. 아득한 여름이 오고 말았어.      


여름만 되면 나약한 인간이 되고 만다. 여름이 유일하게 좋은 이유는 ‘밤 산책’ 때문이지. 낮의 열기가 고스란히 남아있는 아스팔트와 식어버린 공기 사이를 걸을 때. 가끔 한 번씩 불어오는 바람에 ‘아- 좋다’ 하고 내뱉는 진심. 미술관 뒤 벤치에서 시원한 맥주를 들이키는 우리. 여름밤의 노래들을 틀어놓고 청푸른 색의 여름 하늘을 바라보는 일.      


차분히 제자리로 돌아가야지. 다시 따스하고 고요한 침묵 속 공감의 자리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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