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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키티 Jul 07. 2020

부암동의 여름

    

나는 겨울 인간이다. 아침에 눈을 떴을 때, 이불 밖 다리의 찬 기운에 하루의 에너지를 느끼는 사람. 솜이불의 무거움과 그 안의 온기, 코 끝에 느껴지는 겨울의 기운에 괜히 킁킁거리기. 온수매트가 물 달라는 소리. 어두컴컴한 새벽. 그냥 겨울이 좋은 건 덥지 않기 때문이다.


원래도 열이 많은 인간인지라, 여름만 되면 무기력해지고 고립된다. 그래서 늘 여름이 힘들었다.     


부암동에 이사 오고 보낸 첫여름에도 그랬다. 회사에 매일 출근하지 않아도 되는 프리랜서라는 이유로, 나는 시원한 여름을 보낼 수 있었다. 해가 질 무렵이 되면 슬금슬금 집 밖으로 나갔다. 비타민D는 부족해지고, 여기저기 탈 나기 시작했지.      


다시 체력을 키우는데 반년 이상의 시간이 걸렸다. 몸은 정상수치로 돌아왔지만 쉽게 지쳤고, 체력이 안 되니 포기하는 것이 많아졌다.      

초록과 파랑에 둘러싸인 부암동     


이곳에 온 지 2년이 다 되어간다. 정감 가는 동네지만, 때로는 낯설기도 하다. 이제야 ‘우리 동네’라고 말할 수 있게 됐다. 얼마 전 동네 청년회가 열렸다. 동네모임 어플 '우트' 게더링에 참석했는데, 때마침 이웃동네에 살고 있는 비슷한 연령대의 청년들이 모였다. 서울 속 시골이라며, 이곳이 좋은 점과 계절마다 겪는 고충들을 하나씩 털어놨다. 대부분 산동네에 살고 있어서, 여름이면 슬리퍼가 빗물에 떠내려간다던지, 눈이 오면 고립되거나 도시에서 집으로 돌아오지 못할 때도 있다고..ㅎㅎ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암동을 떠나지 못하는 이유는, 여름 때문이라고 했다. 지난겨울과 봄을 이겨낸 나무들은 눈에 띄게 자랐고, 그 아래엔 1년 사이 더 커버린 그늘이 일렁인다. 바람이 나뭇잎 사이를 스쳐 지나갈 때마다, 각자의 방향으로 춤을 춘다.     


나무 멍을 한참 때리고 나면 그다음은 구름 멍이다. 일주일에 많으면 이틀은 파란 바탕에 흰 구름이 흘러가는 하늘을 볼 수 있다. 높은 건물이 없는 부암동에서는 초록과 파랑의 콜라보를 볼 수 있다. 그저 멍- 구름을 따라 천천히 눈동자를 옮겨간다. 해 질 무렵 즈음 인왕산을 올라가거나, 윤동주 시인의 언덕 위에서 핑크빛으로 물든 일몰을 보기도 한다. 날이 맑은 날엔, 일부러 그 시간에 맞춰 산책을 나가기도 한다.

때로는, 한낮의 외출을 감행하기도 한다. 뜨거운 볕을 온몸으로 맞으며 외친다 “비타민D 흡수하자” 순간순간 불어오는 바람이 어찌나 시원한지. 정수리가 뜨거워지고, 이내 뒷목에서 땀이 흐른다. 화장도(이미 마스크로 인해 포기했지만) 나오기 전에 바짝 말린 머리카락도 포기한다. 여름은 포기할 줄 알아야 하는 계절이다.

    

요즘은 야외 운동을 즐겨하고 있다. 남산을 걸어 올라가거나, 인왕산 야행을 한다거나, 경복궁 돌담길을 따라 쭉 뛰며 여름밤을 즐기고 있다. 여름이 끔찍했던 나는, 부암동 덕에 서서히 이 계절을 사랑하게 됐다.  수박을 한통 사 조각 썰기를 해 통에 넣어두는 일. 자취하는 동네 친구들에게 수박을 나눠주며 이 여름을 기억한다.


올해 여름은 제자리로 돌아가는 시간이 될 듯싶다. 혼자 보내는 시간이 즐겁고, 또 함께 보내는 시간들은 유익하다. 7월의 목표들이 뚜렷하다. 초록으로 선명한 여름을 보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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