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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키티 Apr 21. 2020

비 오는 날의 종묘를 알고 있나요

취향의 교집합



비 오는 날 종묘를 간 것은 우연이었다. 그날은 부산에 있던 친구가 삼청동으로 면접을 보러 온 날이었는데, 관광지에 가고 싶다고 했다. 삼청동 구석에 있는 한식집에서 순두부찌개를 먹었다. 조미료 맛이 듬뿍 느껴지는 짜고, 달고 눅눅했던 식사였다.     


창 밖에는 비가 투툭투툭 내렸다. 내 기억엔 2월 무렵이었던 것 같다. 부산에서 온 친구는 얇은 외투를 걸쳤고, 나는 옷장에서 제일 두꺼운 코트를 입고 있었다. 서울 날씨 무서운 줄 모른다고 하자 부산은 늘 따뜻해서, 두꺼운 겨울옷을 사도 몇 번 입지 못한다며 투덜거렸다.    

우리는 종묘로 향했다. 초등학생 때 조별 숙제로 온 뒤로 처음 온 것이었다. 종묘는 사적 제125호로 세계문화유산에 등재 됐다. 종묘는 경복궁보다도 먼저 지기 시작했다. 현재는 19칸의 기다란 제례 건축이지만 처음에는 정전 5실, 세종 때 영년전을 지어 일부 신위를 옮기고 명종 때 정전 4칸을 증축했다. 광해군 당시 11칸을 중건했고 영조, 현종을 걸쳐 19칸이 되었다. 조선시대 역대 왕과 왕비의 신위를 봉안한 사당인 종묘는 동아시아의 유교적 왕실 제례 건축으로 현재 우리나라에만 남아있다고 한다. (원래는 중국에서 유래됐다고 한다)     


종묘는 시간제로 운영되고 있고, 해설자와 동행하며 이동할 수 있다. (자유관람 토요일, 마지막 수요일, 국경일, 명절) 친구와 간 날도 시간제 관람만 할 수 있어 대기 중이었던 이들과 함께 이동했다.     


종묘를 둘러싼 나무들은, 간신히 나뭇가지만 꺼내놓은 채 겨울을 버텨내고 있었다. 나무와 나무 사이에는 물안개가 피어올랐다. 빗물이 흙과 함께 튀어 올라 이미 신발과 바짓단은 젖어있었다. 신로를 사이에 두고 걸으며 친구와 나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비 오는 날의 종묘. 서늘한 기운을 느낄 새 없이 종묘가 주는 분위기에 압도당했다. 침묵으로 거닌 그 한 시간은 ‘비 오는 날의 종묘’라는 특별한 장소를 내게 가져다줬다.    

“비 오는 날은, 종묘지”     


유독 취향의 교집합이 많은 사람이라고 느껴왔었다. “비 오는 날의 종묘를 가봤어?” 아마 서로 자신만 알고 있는 날과 그날의 장소라고 여겨왔을 것이다. 처마 밑에서 정전을 바라보며 음악을 들어본 이였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종묘 입장권에는 눈이 쌓인 사진이 담겨 있잖아. 아직 눈 오는 날의 종묘는 가보지 못했어.”     


첫눈이 오면 종묘에 가야겠다 다짐했다. 아쉽게도 그해 겨울 첫눈은 눈치챌 수 없을 정도로 잠깐 내렸다. 아, 눈이 내리는구나 하는 날에 나는 창경궁에 갔다. 지나던 길이었거든.


우리가 함께 종묘에 간 날은 초록물이 가득했던 어느 봄날이었다. 아마도, 봄 한가운데. 입장권에는 성인 2명이라는 글씨가 적혀있었다.     

코로나 19의 영향으로 인해 시간제 운영은 중단됐고, 이로 인해 종묘를 자유롭게 거닐 수 있었다. ‘비 오는 날의 종묘’를 알고 있는 사람과의 산책. 새 구두를 신어 뒤꿈치에서 피가 났지만, 그저 하염없이 걷고 싶었다. 혼자인 듯싶지만 나의 느릿한 걸음을맞추며 걷는 이가 있었다. 이곳에서 사진을 찍어야 정전이 전부 들어온다고, 이 계단에 서서 보는 종묘는 또 다른 느낌이라며 재잘거리는 목소리가 듣기 좋았다.     


닮았다는 말은 꽤나 추상적이면서도 혼자만의 착각과 오류일 가능성이 크다. 점점 “우린 너무 닮았어”라는 말을 꺼내기가 조심스러워진다. 둘 중 누군가가 상대방의 취향을 배려해주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 이후부터일까. 그 배려가 고마웠고 아마도 오래도록 떠오를 것 같다. 사람은 휘발되어도 그날의 온도와 내가 느낀 감정들은 꽤나 깊은 곳까지 남아있다. 그러니 오래오래 고마울 것이다.

    

며칠 전 봄비가 내렸다. 종묘 근처에 갔다가 들어갈까 말까 한참을 고민했다. 그날 신은 구두는 이제 발에 익숙해져 마냥 걸어도 편안하다. 정문 앞까지 갔다 이내 종묘 돌담길로 발길을 돌렸다. 좋아하는 공간을 누군가에게 공유한다는 건, 꽤나 큰 용기가 필요한 일이다. 나는 아직 용기가 부족하고.



종묘의 사계절

 

지난 가을의 종묘.




네가 좋아할 것 같은 공간을 찾았어.라며 어느 여름에 간 #서울집시 여전히 나는 이곳을 좋아하고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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